몸, 욕망을 말하다(키머러 라모스 지음) : '호흡하여 움직이고 움직여 호흡한다' 여러 호흡법 책을 읽었다, 그 중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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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감각, 감정

몸, 욕망을 말하다(키머러 라모스 지음) : '호흡하여 움직이고 움직여 호흡한다' 여러 호흡법 책을 읽었다, 그 중 최고.

by 당편 2022.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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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그 미세한 순간들이 적혀 있다. 그래서 공감되고, 내 안에 것들이 문장화된 것을 읽는 것이 기뻤다.  그 순간을, 그때의 감각을, 느꼈던 감정을 적고 거기에 따라붙는 질문을 붙잡고 답을 찾는 과정이 보였다. 

 

책의 말투가 좋다. 의식의 흐름대로 이어지는 듯하지만 주제를 놓지 않는다. 느끼거나 반응하고, 떠오르는 질문을 바라보고, 심장 조임같은 신체 감각을 인식하고, 피부에 닿는 감정을 살피고, 연상되는 기억을 바라본다.                                        

 

 책에서 딱 하나만 배워도 충분하다는 마음 가짐으로 살고 있다. 오옹. 네 가지나!! 

 

1.내가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세계를 창조하는 것. 

2.호흡하여 움직이고 움직여 호흡하는 것. 

3.내 움직임이 나를 만든다는 것. 

4.순환 호흡


71 무엇을 먹을지 선택하려면 무엇이 자신의 몸에, 자신에게,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좋은지를 스스로 솔직하게 알아내야 한다. 

 

72 소란스럽고 공허한 음식은 몸에도 소란스럽고 공허하다는 사실을. 몸에 해로운 음식은 지구에도 해롭다는 사실을. 한 웅큼씩 두 번이나 집어먹었다면 이미 도를 넘어섰다는 사실을. 그 정도면 됐어. 

 

당신이 음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먹을 때 당신이 느끼는 감각은 무엇인가? 당신의 몸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 

 

비만 유행병과 이를 둘러싼 무수한 문제들을 처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칼로리 감량이라는 일시적인 처방을 뛰어넘어 자신과의 관계를 다져나가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73 선택권은 어지러 우리만큼 무수히 널려있다. 바로 그 때문에 몸의 지혜를 키워나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먹을지 가려내는 것이 어느 때보다 더욱 중요하다. 

 

 74 나는 매일매일 욕구가 부르짖는 만족을 얻고자 마음을 쏟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 되도록 내 식욕을 스스로 느끼고 이에 반응할 것이다. 그렇게 먹으면서 이 정도면 됐다, 할 때를 스스로 알아차리고 싶다. 

 

75 우리가 움직여 호흡하고 호흡하여 움직인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론적으로만큼은 알 수 있게 되었다. 

 

욕구는 움직임이다. 즐거움을 안겨줄 무언가를 향해 움직이도록 이끄는 우리 안의 움직임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이 자신과 맞는지 나날이 새로운 정보를 얻듯 욕구 역시 끝없이 변화한다. 

 

새로운 것을 해로운 것으로 감지하며 그 해로운 무언가를 멀리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젊음과 활기의 증거다. 

 

76 이때 식욕을 자신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 된다. 

 

그렇게 열 개째를 먹고 나니 점점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다. 뱃속이 거북해진다. 하지만 거북함을 무시한다. 한 봉지를 모두 해치우고 난 뒤의 만족감이 얻고 시다. 이제 구역질이 날 지경에 이르렀다. 

 

77 그러면서 자신이 몸의 주인이라고, 자신은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고 증명해보이기 위해 과자를 한 조각 더 입에 넣으려 한다. 하지만 더 큰 즐거움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처럼 몸의 저항을 짓누르면 짓누를수록 그토록 바라던 즐거움을 감지할 능력은 점점 더 무디어질 뿐이다. 

 

불쾌감이 욕망의 지혜를 드러낸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품은 이상(더 많은 과자)은 실제로 진정한 즐거움을 안겨울 행동(그만 먹기)과 어긋나 있다고 불쾌감이 말해준다. 욕구를 만족시키고자 행한 움직임이 도리어 우리를 병들게 하고 있다고! 우리 안의 지혜는 그만 멈추라고 외친다. 

 

더 먹으면 불쾌해지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불쾌감쯤이야 지금 당장 더 먹고 싶다는 욕구에 비할 것이 못 된다. 그럼 어찌해야 할까? 그 의도가 아무리 좋다 해도 이렇듯 강제하고 부정하는 마음에 의지하게 되면 우리는 몸이 거부하는 음식을 끝내 입에 넣을 것이고 결핍감을 만회하기 위해 더 많이 먹게 될 것이다. 자신과의 관계를 투쟁으로 인식하는 순간, 무엇을 먹든 안 먹든 우리는 그 투쟁의 패배자가 되고 말 것이다. 

 

78 호흡하여 움직이고 움직여 호흡한다. 호흡하면서 갈급한 마음속 긴장감을 땅으로 내려보낸다. 놓아준다. 가라앉힌다. 앉아 있거나 서 있는 자신을 내면에서부터 느낀다. 연결된다. 어디 있는가? 어떤 느낌이 드는가? 

 

이 느낌을 왜 이리도 강렬한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최상의 즐거움은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 

 

즐거움을 얻으려 움직이기 위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79 우리는 결국 숨을 쉴 때마다 몸이 느끼는 불쾌감을 더욱더 예민하게 감각하고 반응하면서 먹기를 그만두게 될 것이다. 

저 과자를 진짜로 먹고 싶은가? 호흡의 시공간에 들어서게 되면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은 과자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치게 된다. 내가 과자에서 얻고자 했던 것은 달콤한 맛이었다. 하지만 몸이 전하는 포만감을 억압하는 순간, 과자는 더 이상 달콤하지 않다. 바라던 즐거움을 더 이상 안겨주지 못한다. 입 안에 느껴지는 맛이 변질된다. 과자는 내가 배고플 때에만 비로소 내가 원하는 과자가 된다. 마음을 다잡는다. 안 먹겠어. 지금은 아니야. 과자를 멀리하는 순간 일말의 슬픔이 샘솟는다. 정말이다. 이렇게 떠나보내다니! 하지만 슬픔이 물러가는 즉시 안도감이 찾아든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몸의 감각을 짓누르는 폭력을, 그에 뒤따라 피할 길 없이 만나게 될 아픔을 모면한다. 

 

 우리는 자신의 건강을 지키고 원하는 나로, 자신의 건강은 스스로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또 다른 나로 탄생한다. 달콤한 안도감. 

 

80 식욕이란 단순히 그 순간 먹고자 하는 욕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가 음식에서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생각과 감정, 행동 속에서 움직일 기회를 얻어 스스로 영양을 공급받는 즐거움을 자신 안에서 탄생시키는 것이다. 이제 배부르네. 많이 먹었어. 이거면 충분해. 다시 돌아가보자. 호흡하여 움직이고 움직여 호흡하는데 배고 꼬르륵거린다면? 뱃속은 비고 머리는 가벼워졌다. 그럴 때에도 과자를 먹으려 할 것인가? 그럴 때 감각을 곤두세워 허기에 집중하면 대개는 배가 고픈 순간에도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과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이 허기에 응답해줄 무언가, 강력한 기운을 답고 뱃속에 차분히 내려앉을 무언가를 원하게 된다. 

 

허기를 느낄 때, 그와 함께 욕구가 변화하며 자신에게 영양을 공급해줄 음식을 갈망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전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81 허기가 한풀 꺾이고 나면 무언가 달콤한 것, 과자 한 조각 정도를 바라게 될지도 모른다. 한 입 베어무는 것만으로도 영양분을 공급받는 감각과 포만감 사시의 빈큼을 채우기에는 충분하다. 그 한 입만로 우리는, 육체적 자아가 된 우리는 살갗이 요동치는 기쁨을, 바라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 도달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욕구는 서서히 변화하는 까닭이다.

 

자신과의 관계를 키워나가 즐거움의 포물선을 따라 포만감에 이르는 길을 존중하며 그 길을 좇아가는 문제다. 

 

배가 거의 찼다. 하지만 아직 멈추고 싶지 않다. 식탁은 엉망이다. 

 

82 아무 생각 없이 계속 먹고만 있으면 이들을 죄다 치울 기운이 날 것 같다. 하지만 욕심일 뿐, 더 먹어봤자 소용이 없다는 사실은 나 자신이 더 잘 안다. 그러니 호흡에 집중하며 내 안의 모든 짐을 땅으로 내려보낸다. 이제 배가 불렀으니 그만 멈춘다. 

 

84 혼자 먹고 있다 해도 우리가 먹는 음식은 여러 지역에서 다른 이들의 손을 거쳐 우리 식탁에까지 올라온 것이다. 이 어지러운 식탁에 도달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땅 에서, 이 흙과 물에서 시작된다. 음식을 재배하고 수확하고 가공하고 유통한 뒤 조리하여 먹기까지의 온갖 절차가 이 땅을 끝없이 비옥하게 만든다.

 

이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또 어디로 가는지 등, 전에는 알지 못했을 사실들을 접한다. 스스로 영양분을 공급하면서 얻고자 한 즐거움은 곧 이처럼 자신이 음식을 즐길 수 있게 해준 수많은 이들의 건강, 행복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85 먹으면서 우리는 세상을 창조한다. 

 

자신이 이 세계를 창조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책임감을 느끼고 먹는 법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그 대답 역시 욕망 안의 지혜, 그리고 그 지혜를 가려내기 위해 키워온 감각의 인식이 확실히 안내해줄 것이다. 

 

86 압박감에 시달릴 때든 자유로이 뛰놀 때든 누구나 익숙한 것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그러니 이보다 더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움직임이 자신을 어떻게 만드는지 감각의 인식을 키워나가면서 이러한 정보를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반응할 때 무언가 다른 일이 벌어진다. 

 

87 우리는 무엇을 구입할지, 자신의 몸에 무엇을 집어넣을지 자유로이 결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선택사항들은 미묘하게 통제되어 포만감을 짓누르고 음식을 필요한 양 이상으로 먹게 만든다. 

 

88 식품제조업자들은 값싼 재료에 자극적인 첨가물을 집어넣은 뒤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이윤을 창출하고자 한다. 

 

자신이 바라는 즐거움, 이제야 알게 돈 그 즐거움을 전해줄 음식, 스스로 위장하거나 감각을 농락하지 않는 음식, 포장되지도, 진공처리되지도, 화학물질을 주입하지도 않은 음식을 원하게 된다. 

 

90 나로서는 고기를 먹겠다고 결심하는 일이야말로 불만을 느끼는 몸의 감각을 짓밟는 것이며 내가 아닌 남을 위해 억지로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결심함으로써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세상, 모든 이들이 포만감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기회와 능력을 얻는 세살을 현실이라 이름 붙이고 또 현실로 만드는 것이다. 

 

91 먹기에서 위안을 찾으라면서 먹을 때의 감각적 경험은 잊고 무엇을 먹고 있는지도 무시해버리라는 압박이 우리를 위협한다. 

 

92 움직이자. 움직이면 음식을 선택하도록 이끌 우리 안의 원천은 투쟁의 대상이 아닌 버팀목이 될 것이다. 

 

음식이 어떻게, 어디에서, 누구의 손을 거쳐 만들어지고 어떻게 운송되는지도 알아야 한다. 

 

이 과없은 끝없이 계속되긴 하지만 그만큼 끝없이 결실을 맺어낸다. 

 

93 미끄러져 내려가며 나를 열어젖히고, 무엇이 됐든 서성이는 인식의 웅덩이 안으로 나를 내려앉힌다. 

 

식욕은 칼로리나 음식의 내용물을 향한 것이 아니다. 식욕은 자신과의 관계를 향한 것이다. 

 

94 음식으로 자신을 보살피려 해선 안 된다는 것이 전달하려는 핵심은 아니다. 핵심은 우리가 감각의 인식에서 떨어져 있다는 사실, 자신을 보살펴주고 이끌어줄 인식과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욕구가 뒤엉키는 것은 욕구의 한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대체했기 때문이 아니다. 욕구가 뒤엉키는 것은 마음이 명징하지 못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혼동하여 드러나는 현상이 아니다. 이 뒤엉킨 욕구 자체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165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요구하는 법을 익힐 수 없을 뿐 아니라 바라는 것을 요가히자 못하도록 스스로를 억누르는 훈련을 하게 된다. 감각적 인식을 되살리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조차 상상하지 못한다. 육체가 끈질기게 바라는 감각은 비단 육체적 접촉만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상냥하게 던지는 질문, 무언가를 묻는 듯한 시선, 힘을 북돋아주는 말 한마디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다. 

요구하지 않으면 마찰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 그러면 즐거움을 감별해낼 장치를, 즐거움으로 이끌어줄 감각의 신호를 잃어버리게 된다. 
 
166 자신이 바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또 요구하지 못하면, 더군나다 그것을 지금의 관계를 굳건히 다지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결국 자신 안에, 관계 안에 침묵의 꾸러미를 쟁여놓게 되는 것이다. 죽은 공간. 관계는 뒷걸음질친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요구하면 더 많이 줄 수 있다. 

당신이 내게 요구할 때 내 안에는 어느덧 그 어느 때보다 당신에게 기꺼이 응답할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진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상대에게 요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또는 그녀가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것이 된다. 

어떤 접촉을 받고 싶은지 내 스스로 알지 못하면 요구할 수도 없다. 나는 내가 요구하지 않는 것이 곧 베푸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니었다. 

따뜻한 대화를 바라는가, 우정을 바라는가? 숨 막히는 포옹을, 부드럽게 감싸쥐는 손길을 원하는가? 공감해주는 말, 재치 넘치는 말 한마디가 듣고 싶은가? 낭만적인 저녁식사나 산악 하이킹을 바라는가? 움직이고 싶은가, 그대로 있고 싶은가? 얼굴을 마주 보며 손을 맞잡고 싶은가, 옆에 나란히 앉고 싶은가? 무언가를 함께 나누고 싶은가. 같은 행사에 참여하고 싶은가? 춤을 추고 싶은가? 상대에게 자신의 무엇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존중받고 싶은가? 어떤 식의 접촉이 당신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게 해주는가? 욕망에서 지혜를 가려내고, 더 나아가 평생 지속되는 무르익은 사랑을 키워나가게 해줄 접촉은 무엇인가? 당신은 알고 있는가?

바라는 것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기 위해서는 자신을 만드는 움직임을 감각으로 인식하고 그 인식을 키워나가야 한다. 

170 상대가 이러이러하게 움직여달라고 요구하면 우리는 흔히 방어태세로 나오거나(아까 했잖아) 탐탁지 않아 한다(그럴 생각은 안 해봤는데). 상대를 낙담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상대에게 요구하고픈 자신의 충동이 함께 나눌 만한 거리가 못 된다거나 반대로 너무 부담을 줄지도 모른다고 지레 판단하기도 한다. 그러한 불안을 숨기고 태연한 척하면서 자신을 절제가 뛰어난 사람이라고 홀로 의기양양해하며, 이렇게 스스로 양보하는 것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하다 믿는다. 

171 자신이 원하는 바를 상대에게 내보이지 않는다면 상대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숨을 깊이 내려보내 갈망이 뒤엉키고 좌절감이 고단하게 밀려드는 순간으로 파고들면 고통으로만 느껴지던 감각들이 선물로 다가오면서 상대에게 적절한 공감을 요구할 수 있게되고, 그로써 사랑의 강물에 온몸을 던질 수 있게 된다. 

상대가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한다는 것은 곧 상대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욕망 믿는다는 방증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소통할 방법은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 

상대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그 모양새에 연연하지 않고 믿는다는 것이 곧 희망을 품고 서로를 대한다는 뜻이다. 

172이제 나 자신의 즐거움에 대해서만큼은 전적으로 내가 책임질 것이다. 나는 그가 어디를 어떻게 언제 만져주면 좋을지 숨김없이 말하고 그는 이에 군말 없이 따라주기로 했다. 

서로에게,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라 부르짖는 것이 바로 욕망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목소리가 크면 클수록 우리의 감각은 더욱 예민하게 반응해온다. 그리고 우리는 더욱 자유로워진다. 

173 바라는 것을 요구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할 때는 언제인가? 그런 요구는 차마 못하겠다고 느낄 때는 또 언제인가? 좌절하고 안달하는 자신의 감정이 혐오스러워서, 관계에 성가신 눈엣가시가 될 것 같아서 이러한 감정을 그저 삼켜버리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할 때는 언제인가? 그런 순간에 자신의 욕망을, 자신을 향한 상대의 욕망을 믿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은 무엇인가? 최악의 상황은 언제인가? 가장 두려운 것은? 상처받을까봐? 실망하게 될까봐? 숱하게 거절당할까봐 걱정인가? 상대가 받아주지 못할까 의심하는가? 혹은 자신이 잘 응해주지 못할까 불안한가? 왜 그런가? 특별히 이렇게 만지면 마음속에서 경고음이 울릴 때가 있는가? 반대로 기쁨의 횃불이 비출 때가 있는가? 

자신의 부족한 점을 메워주고 완성해줄 영원의 짝을 만난다니 과연 있을 수나 있는 일일까? 그 답은 믿음이 말해준다. 우리는 상대에게 이렇게 만져달라 요구하며 자신의 욕망을 따를 때 진정한 자신으로 거듭나니라 믿을 필요가 있다

174 요구하고 신뢰하는 생활을 실천하면서 우리를 둘러싼 세계, 우리 안의 세계는 점점 더 현실과 가까워진다. 

상대방 역시 변화한다. 우리 때문에, 우리를 향한 욕망 때문에 상대는 우리를 감각하고 믿으며, 우리에게 반응하며 변화한다. 따라서 함께하는 순간 상대에게서 나오는 작은 몸짓 하나, 말 한마디, 사소한 움직임 하나로 우리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175 이것이 바로 확신이다. 당신이 진정한 당신으로 거듭나도록 무슨 일이 됐든 도울 때 나 역시 진정한 나 자신으로 거듭난다는 확신이다. 내가 변화하도록 독려해줄 때 당신 역시 바라던 자신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당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당신에게 날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며 여러 시련을 마주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세상에 베풀어야 할 것을 펼쳐보이며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세상에 베풀어야 할 것이란 바로 욕망을 만족시키는 일이다. 

178 욕망 안에 지혜가 있다. 여기서 역겨운 느낌이 무슨 뜻인지는 다들 알 것이다. 그런 느낌이 든다는 자체가 껄끄럽고 반갑지도 않은데 좀처럼 떨쳐지지도 않는다. 

열에 아홉은 몸을 억누르는 마음의 소리를 따른다. 차오로는 감정을 외면한 채 다른 다양한 자극(음식이나 영화도 포함된다)에 관심을 돌리며 그 감정을 털어내려 한다. 자신 안에서 일어난 감정이지만 사랑을 위해 억눌려야만 한다며 스스로 변명한다. 혹은 상대에게 감정을 표출한 뒤 부끄러워하며 등을 돌린다. 호흡할 시간이다. 

179 이 순간, 깊어져가는 불만의 소용돌이를 호흡 순환법으로 막아선다. 호흡하며 움직이고 움직여 호흡할 때 자신 안으로 맞아들이는 경험 또는 변화한다. 

식욕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변화를 겪으며 우리는 지금 느끼는 감정, 피하고만 싶은 이 감정이 곧 더 많은 것을 갈망하는 욕망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더 많은 것이란 지금 당장은 없지만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 언젠가는 필요한 무언가, 즉 삶이 충만해지는 접촉을 일컫는다. 

숨을 땅을 내려보내니 감정의 기저가 드러난다. 우리 두 사람이 그 순간 속에서 더 원활히 소통할 수 있었다는 점을 믿지 않았다면 이처럼 실망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상대에게서 삶이 충만해지는 접촉을 바라지 않았다면 이런 감정을 느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 감정은 상대를 향한 욕망이 표출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난 뒤 땅과 함께하는 호흡으로 좌절감과 실망감의 본디 생김새에 마음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본다. 압박감을 떨쳐낸다. 호흡을 통해 자신을 떠받드는 땅의 힘을 느끼면 기운이 모이면서 그래, 이것이 바로 내가 느끼는 내 감정이야, 라는 확신이 든다. 이것이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나 자신이다. 이 관계 안에서 내가 움직여 스스로 만들어낸 나 자신이다, 그러니 괜찮다. 난 더 갈망한다. 심장으로 숨을 들여보내고 공기와 맞닿은 피부로 숨을 내보내면서 구겨진 좌절감이나 질투덩어리를 곱게 편 뒤 이를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자신의 욕구로 뚜렷이 감각한다. 이 감정은 그 순간 자신과 상대에게 더욱 충실하기 위해 함께 나누어야 할 욕구로 뚜렷이 감각한다. 

180 과거의 상처 때문에 보호막처럼 마음의 벽을 쌓아올린 자신의 일부가 이제는 찢어질 듯한 경고음을 소리 높여 내질러 자신을 압도한다. 

상대를 알아가고 느끼며 더 큰 사랑을 주고받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 됐든 바로잡으라고 욕구가 소리친다. 

이 순간 우리는 상대에게서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더 많은 것을 갈망한다. 삶이 충만해지는 접촉을 주고받고자 갈망한다. 상대에 대한 사랑을 통해 자신 안에서 자신이 바라던 모습을 찾아내고 펼쳐내고자 갈망한다. 나는 더 줄 수 있어. 

181 우리는 현재에 온전히 충실하여 상대가 아직 그런 상황에 이르지 못했다 해도 그와 관계를 맺으며 움직일 준비를 갖추고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분한 마음이나 적개심 없이, 자기연민이나 두려움도 없이 삶이 충만해지는 접촉을 주고받고자 하는 욕구를 꾸밈없이 털어놓으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고 또 기꺼이 그렇게 한다. 

우리는 안다. 순간을 함께 나눈다는 사실, 그 순간에 서로 충실하다는 사실, 그것이야말로 함께하고 싶다는 가슴 벅찬 욕구를 표현하는 것이기에 그 어떤 의미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요구란 상대가 그 자신의 욕구를 따라 움직이면서 우리와 접촉할 수 있도록 맞아들이는 초청장이다. 

두 사람은 관계를 맺으며 이어지는 움직임이 그들 자신 안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그 순간을 함께 끌어안을 수 있게 된다. 

182 하나의 몸인 우리는 욕구가 좌절되고 옥죄이는 순간이 곧 관계 자체라는 사실을 안다. 

183 그러니 가로막히는 순간이 다가오면 심호흡을 하며 이를 기쁘게 맞아들이는 편이 좋겠다. 그 순간이 우리를 친밀한 관계로 이끌어 줄 것이다. 

184 항상 그와 나를 연결해주던 감각기관들이 스스로 보호하려는 듯 움츠러들었다. 고립되고 쫓겨난 기분에 불쑥 화가 났다. 불쾌감이 밀려왔다. 

185 아린 상처가 아물어 사랑의 물줄기를 타고 흐르기까지 어떤 계기가 필요했다. 그러려면 내가 원하는 것을 그에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가 어떻게 나올지 그 누가 알겠는가. 

그는 아직도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려고만 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지금의 내 기분을 뚜렷이 알아차릴 때까지 기다렸다. 이 다음 해야 할 말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렸다. "당신이 날 언짢게 대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내가 말햇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이리도 힘들다니! 그리고 다시, 나는 이 불편한 마음속까지 숨을 밀어내며 그 억눌려서 마구 고동치는 감각을 느꼈다. 

186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깊이 숨을 들이쉬고 흘려보냈다. 그래, 어디 무슨 일이 생기든 다 무릅쓰고 지금 내가 믿는 사실을 말해보자.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우리 서로 사랑하지 않아" 그래도 소용없엇따. 

계속해서 숨을 내려보내고 뱉어내고 흘려보냈다. 불안하고 비참한 마음이 자꾸 나를 그에게 떠밀었다. 이 자리를 벗어나 편안한 곳에서 웅크려 있고 싶었다. 그런데도 그를 향한 충동이 자꾸만 치밀어올랐다. 나는 얼결에 그 충동을 따라가 입을 열었다. 

187 "전에도 이런 적 있었지. 그때도 당신이 자기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나는 그 벽을 어떻게 깨드려야 할지 몰랐어."말하는 순간 강한 압박감이 나를 짓눌러왔다. 그가 가까이 다가와 나를 껴안으려 했다. 난 물러섰다.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는 받아줄 수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날 대하지 않고 있었다. 안 그런 척하지만 그는 여전히 멀리 있었다.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게 뭘까? 물러나 있긴 했지만 여전히 가까이 서 있었다. 아직 닫아버리지 않은 채. 

"당신이 날 비난할 때 마음이 아팠어.당신이 하는 말들이 너무 아파서 난 그저 다 그만두고 싶었어." 그랬구나 이해가 갔다. 참았던 말들이 속사포처럼 흘러나왔다. 나도 그를 비난할 뜻은 없었다. 그만큼이나 나도 일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었을 뿐이다. 그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번엔 진심이었다. 느낄 수 있었다. 안정이 찾아왔다. 나도 미안했다. 이제 우리는 서로의 눈앞에 온전히 존재했다. 

188 제프는 내가 바라는 것을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는 내가 자신을 탐탁지 않게 느끼도록 만들엇따는 이유로 화를 내며 내게서 등을 돌린다. 나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겟는데 자꾸만 불쾌한 감정이 치솟는 것에 화를 매녀 나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나 자신을 외면하지 않는다. 비난하거나 화를 내지도 않은 채 그를 향한 갈망을 감각으로 인식하며 그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을 한다. 그에게 다가가고 싶다는 욕구가 좌절되면서 전해지는 이 아픔을, 그를 향해 움직일 수 있는 자극으로 바꿔놓는다. 물론 나 자신을 열어놓는 것은 쉽지 않다. 아픔을 내지르지 않고 있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나는 잘 안다. 믿는다. 

189 "나에게 제대로 대댑하지 못하리라는 당신의 그 두려움이 바로 당신이 그렇게도 두려워하는 상황을 만든다는 거 몰라?" 

190 영양분을 공급받기 위해 무엇을 먹어야 할지, 이에 대한 구체적인 답은 없다. 마찬가지다. 삶이 충만해지는 접촉을 불러들이는 성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에 대해 정해진 길은 없다. 

191 성관계는 놀이다. 몇 번이고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파고들어 서로에게 있는 힘껏 충실하는 시간, 욕망을 따라 기꺼이 감각하고 움직이는 시간, 서로 길들여지는 시간이다. 

성관계는 육체적이든 아니든 저촉의 다양한 꼴을 경험하는 행위, 우리 자신을 자유로이 풀어헤치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줄 욕망의 숨은 힘을 발견하는 행위다. 욕망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말이나 몸짓, 생각과 감정으로도 그 가능성을 시험할 수 있다. 좌절된 마음을 무심코 드러낼 때나 근심을 쏟아낼 때, 함께 식사할 때나 숲속을 거닐 때 등 갖가지 활기 가득한 일상들이 일깨우는 삶의 충만한 접촉을 우리는 마음껏 탐험할 수 있다. 

연인과 함께, 연인을 향해 움직이는 법을 익히며 우리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한층 가까이 맞아들인다. 이렇게 우리가 나누는 즐거움이 갈 길을 말해준다. 

성관계에서 중요한 점은, 성관계를 하지 않을 때에도 언제 어디서나 서로를 향해 함께 움직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연인과 함께 하는 매 순간은 시시각각 다르게 나타나는 서로에 대한 욕망과 함께 리들을 타고 흘러간다. 

193 자신에게, 서로에게 충실하라고. 

같은 상황을 일으켜보려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제와 같지 않다. 같은 상황을 반복해보려는 시도 속에서 우리는 함께하는 매 순간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배운다. 그렇기에 매 순간으로 빠져 들어가 그 순간만의 잠재력을 펼쳐놓기 위해 더욱더 익히고 훈련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다시금 자신이 원하는 접촉을 상대에게 요구하고 자신의 욕망이 나아갈 길을 말해주리라 믿으며 그렇게 해서 진정한 자신으로 거듭나리라 믿는다. 

194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제한하여 욕망 또한 한정 짓는다고 인식한다면 우리의 관계는 그 어떤 의지력으로도 물리칠 수 없을 만큼 휘청거릴 것이다. 욕망은 점점 더 불안하게 요동치다가 결국 폭발해버릴 것이다. 과자 봉지를 덥석 잡아쥐거나 하룻밤의 정사로 뛰어들지도 모른다. 

195 그후 여지없이 뒤따르게 될 불만족은 불을 보듯 뻔하다. 

우리는 한 사람과 맺는 관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겠다는 선택, 그렇다, 선택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그 무엇보다 원하는 것을 그 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혹은 누군가를 위해 정착하고자 이러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욕망, 즉 상대방을 사랑하고 상대방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존중하고자 선택하는 것이다. 

196 비록 뒤틀리고 어긋났을지언정 욕망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이러한 욕망을 지금 이 순간 움직이며 스스로 만들어낸 것으로 흔쾌히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에게 있다. 파괴하려는 욕망이 분출된다는 것은 대게 우리 자신을 파괴하는 움직임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욕망을 파괴하는 행동이 곧 파괴하려는 욕망을 만들어낸다. 

성욕을 감각으로 인식하면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성욕이 어떤 것인지 감별해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감각의 인식을 깊이 터득할수록 자신이나 타인을 파괴하려는 욕망을 더 이상 바람직한 것으로 비치지 않는다. 그러한 욕망이 제시하는 즐거움은 우리가 바라는 즐거움에 한참 밑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197 자신 안으로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면 이들을 사들이거나 받아들이는 일은 없어진다. 

상대에게 감각을 열어 예민하게 반응하느니 차라리 잠을 자거나 텔레비전을 켜거나 아이스크림을 먹는 편이 낫겠다고 느낀다. 하지만 욕망의 소리를 외면하면 연인관계뿐 아니라 생의 다른 영역에서도 마음으로 몸을 억눌러야 한다는 생각을 영영 떨쳐내지 못하게 된다. 

198 음식이나 성을 대하는 경험이 달라지면서 그 순간 어떤 움직임, 어떤 욕망이 일렁여도 이를 새로이 감각하고 반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영역에서 만족감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불필요하게 과식하거나 무분별하게 성관계를 맺는 등 다른 영역에서 즐거움을 애써 짜내어 그 결핍감을 메우고자 한다면 결국 얻게 되는 즐거움의 총합은 도리어 줄어들게 한다. 뒤엉킨 욕망이 우리를 완전한 건강응로 이끈다. 

영양분을 향한 욕구와 육체적 친밀감을 향한 욕구에서 지혜를 찾아내며 우리는 하나의 세계를, 먹고 사랑하는 움직임이 만들어낸 관계의 모체를 불러들인다. 

199 식욕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세 영양분을 얻었듯이, 성욕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 관계를 맺으며 그 안에서 삶이 충만해지는 접촉을 주고받을 수 있었듯이 

204 우울증에 빠지면 기운을 잃고 호기심이나 의욕이 사라진다.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워진다. 이런 느낌에 잠기면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에게서, 일상생활에서 고립된 채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우도, 뚜렷한 방향감도, 무언가를 해야 할 목적의식도 없어진다. 

206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를 지탱해나갈 에너지를 얻고자 하는 욕구,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목적의식을 품고자 하는 욕구, 둘만의 좁은 장소가 됏던 방대한 우주가 됐건 어떤 상황에서나 어디에 가고 무언가 하는 일에 가치를 부여하고자 하는 욕구다. 정신적 욕구란 곧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확신해줄 생동감과 방향감, 소속감을 얻고자 하는 욕구다. 

207 반대로 결정을 내리지 못할 때,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지 못할 때, 자신의 바람이 불가능해 보일 때 우리는 절망한다. 


우리는 음식이나 성을 단순히 물질적인 것으로 오인하여 식욕이나 성욕은 다스릴 수 있고 또 다스려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개인으로서 우리가 몸의 감각을 억누르며 정신적 욕구를 좇는다면 불편한 느낌이 전하는 지혜도 놓쳐버리고 말 것이다. 

우울이나 근심, 절망 등 무언가를 더 갈망하는 몸의 감각은 곧 어떻게 하면 정신적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근원이 된다. 

209 이러한 상품들은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 그 행복을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는지 가르쳐준다. 목적의식을 찾고 돈을 벌어 성공하는 것, 날씬한 몸매와 황홀한 성관계가 곧 행복이라 외친다. 

속도를 내세요. 조금 늦추세요. 이런 훈련을 해보시죠. 이런 주문을 외워보십시다.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자신을 시험해보시죠. 행복해지세요. 게다가 이런 주문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우리가 스스로 도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도와야만 한다는 생각을 뛰어넘어, 앞장에서 살펴보았던 시리얼 상자의 논리나 영화의 윤리와 정확히 보조를 맞추어 움직인다. 다시 말해 그 상품들은 우리에게 부족한 영혼, 생동감과 방향감, 소속감을 안겨줄 프로그램을 사들이는 일만이 스스로 자신을 돕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스스로 선택해야만 할뿐더러 무슨 일이 있어도 선택해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210 내 삶은 내가 책임져야 하니까.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바꾼다는 논리에는 앞서 기사에서 언급한 향정신성 의약품도 끼어든다. 

211 우리는 우울이나 절망이란 알약 하나 집어삼키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성가신 감정에 불과하다고 믿기에 이른다. 

우리가 낙담하고 풀이 죽어 있는 것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자본주의, 소비자 중심주의 사회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경쟁으로 스트레스는 쌓여만 가고 가치는 좀먹었으며 건강은 허약재히고 목적의식도 흐릿해졌다. 이 덫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가. 

212 다양한 선택사항들을 마주한 상황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장밋빛 미래에서 등을 돌리기란, 불안에 시달리는 몸의 감갹을 바로 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육체적 자아에서 벗어나 과힉이든 종교든 자신이 아닌 누군가, 무언가에게 기대고 싶어진다. 그들에 기대어 무엇이 진실인지,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하면 그러한 것을 얻을 수 있는지 전해듣고 싶어진다. 

213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약속하는 교사나 프로그램 역시 몸을 지배하는 마음오르소 자신에게 호소하며 스스로 선택을 통해 몸을 다스리면서 몸과 몸의 욕망에 머무르는 두려움과 불안, 고통을 떨쳐내라고 촉구한다. 

어떤 상황에서나 우리는 몸의 소리는 억누르고 적대시하면서 마음의 바람은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이렇게 줄지어 늘어선 선택사항들 때문에 영적인 마음으로 감각하는 몸을 억누른다는 생각이 굳어지는 현실을 폭로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품들에 떠밀려 정신적 욕구란 삶의 안정을 위해 필요한 생동감, 방향감, 소속감을 마음대로 선택하거나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라 여기고 받아들이게 되며, 몸은 자신이 올바르다고 마음먹은 대로 이끌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영적인 상품은 어디를 가나 판매된다. 책과 음악, 영화, 패션에서 우리는 경건한 이미지, 종교적인 이미지를 사들인다. 그 화려한 색감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215 불만이 전해주는 감각적인 신호, 달리 움직이는 법을 익히도록 도와줄 그 신호들을 짓밟는 것이다. 우리의 움직임이 바로 우리 자신을 만든다. 문제가 우울, 근심, 절망감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제대로 된 믿음, 세계관, 관습을 선택하려는 노력, 그러한 움직임이 우리를 병들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 영혼의 욕구가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것이라면? 

217 자신의 나약함을 다른 무언가로 만회하려 든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종교가 반창고나 목발이 된 것이다. 

나는 벽에 부딪혀 움츠러들었다. 괜찮아, 스스로를 격려했다. 무언가를 믿어야겠다는 것뿐이야. 침묵. 그런 행동이 과연 합리적인지 내 이성이 의심한다 해도 어쩌겠어. 나는 믿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릴 거야! 침묵. 조금 더 편히 숨을 돌렸다. 마음이 가라앉앗다.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이야. 이내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런 것도 잠시, 새로운 의문들이 튀어올랐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어떻게 무언가에, 내가 믿고 싶은 무언가에 그리도 간편히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그걸 현실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220 그 '무엇' 이름을 붙이면서 실제로 '그것'을 창조한다. 그것은 이성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연구할 수 있는 대상이나 현상의 집합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선택할 수도, 잃을 수도 있는 무언가로 이름 붙이며 창조하는 것이다. 믿음에 실천이 덧붙여진다. 

221 문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 몸을 지배하는 마음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문제는우리가 삶에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만족을 얻기 위한 최선책은 이성의 힘을 단련하여 욕망하는 몸을 다스리고 적대시하는 것이라는 가정이다. 

222 니체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영원불변하는 신을 경험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가치를 창조하면 자신의 육체적 힘을 경험하는 것이다.이들의 주장을 통해 알 수 있듯ㄷ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창조적이고 육체적인 움직임의 힘이다. 우리는 이 힘을 자신의 외부로 투영하여 다른 존재에 귀착시키고 있는 것이다. 

223 세계 창조 과정에 참여하며 즐거움을 누릴 때에야 비로소 그토록 얻고자 했던 생동감과 방향감, 소속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224 그들은 우리가 정신적 욕구를 만족시키려면 우리만의 믿음과 의식, 관습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노동력을 창출하고 자아를 형성하며 가치를 일구어내는 육체적 움직임이 곧 우리의 존재의 삶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인간의 조건으로 더욱 가까이 끌어당기는 질문은 '왜 종교를 믿는가'도 '종교란 무엇인가'도 아니다. 믿음과 실천의 어떤 점이 우리를 끌어당기는가다. 

움직임을 발견하고 단련하고 펼쳐놓을 생각과 감정과 행동의 능력은 무엇인가? 우리의 행동에서 비롯되는 관계는 무엇인가? 호흡하고 형성하는 육체의 어떤 움직임이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며 이를 현실로 만드는가? 

225 미래의 일을 그리며 실천하고 잇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무 미래나 되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살고자 하는 세계를 창조하고 잇었다. 자신의 흥미를 펼치고 능력을 발휘하며 되고 싶은 사람이 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 있는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만든 세계 안에서 아이들에게는 동물과 농장에, 가치와 목적에 이름을 부여하는 힘이 있었다. 

226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사실이기를 바라는 세계에 이름을 부여하고 그 세계를 현실로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스스로 이름을 부여하고 현실로 만든 세계 안에서 아이들은 그처럼 무엇에 이름을 부여하고 이를 현실로 만드는 힘을 얻는 것이었다. 

자신이 만드는 세계 안에서 아이들은 단순히 원하는 것을 얻을 뿐 아니라 진정한 자신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을 획득하는 능력을 얻었다. 

그저 시늉만 할 따름이었지만 자기들끼리는 그 사실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실제로 그 일을 하고 있닫고 느끼고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일리가 잇었다. 생각하고 느끼고 계획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육체적 양식, 즉 농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감각과 반응의 유형을 직접 훈련하는 것이었으니. 움직임을 통해 농장에 살고 싶다는 바람이 현실 속에서 실현 가능해지면서 아이들은 그 안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어디를 가나 자신의 욕구를 시험하고 다듬게 되었다. 

227 나는 조던에게 필요한 것은 확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던에게 낙농장을 방문해도 되냐고 물어봐. 조던의 세계를 존중해줘야지. 조던이 그 세계를 현실로 만들 수 있도록 너희가 도와주렴. 그럼 너희를 초대해서 같이 놀자고 할 거야."

식욕이란 영양분을 공급받아 스스로 영양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228 성욕이란 접촉을 통해 삶이 충만해지는 접촉을 주고받는 법을 익히는 것이었다. 이제 정신적 욕구는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해주는 세계에 이름을 부여하며 그 세계를 현실로 만드는 기쁨에 대한 욕구라는 사실을 깨달을 차례다. 

229 세계에 이름을 부여하고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신이 인간에게 이름 붙이길, 이름을 부여하는 힘이 잇는 창조물이라 했다. 

그렇다면 인간이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는 지배와 정복을 뜻한다는 해석이 현재까지 지배적이다. 

이름을 부여하는 힘을 얻읈록 삶의 정원을 보살피며 이름을 부여할 가치가 있는 대상을 책임지고 돌봐야 하는 것이다. 

231 이름이란 과연 무엇일까? 

232 우리의 눈앞에서 자신 스스로 마술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속임수를 믿어주길, 자신을 믿어주길 바랐던 것이다.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아이가 그 마술을 어덯게 했는지 알고 잇었다고 사실대로 말했다. "하지만 제시카, 엄마한텐 네가 바로 마술이야. 넌언제나 우리에게 마술을 보여준단다. 그 마술의 비밀은 언제까지나 캐내지 못할 거야. 생각지도 못한 어여쁜 단어들을 쏟아내고 엄청난 이야기를 만들어내잖니. "

233 우리에게 바랐던 것은 자신이 마술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주는 것만이 아니었다. 우리가 믿어주어 제시가 스스로 그 마술의 비밀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는 모르는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다가 그 비밀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어떤 관계를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제시카가 원하는 자신이 되는 즐거움, 즉 혼자 비밀을 품고 있고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ㄴㅇ력이 있는 누군가가 되는 즐거움을 누리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위해 속임수를 현실로 끌어들일 수 있는 누군가가 되려 했던 것이다. 이름을 부여하는 힘을 얻으려 한 것이다.

234 이름을 부여하는 힘은 곧 호흡하는 힘이다. 바라는 관계를 창조하고 다시 창조하며 그 안에서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와 함께 진정한 자신을 끊임없이 만들어나가는 것이 바로 이름을 부여하는 힘이다. 움직임을 통해 삶이 충만해지는 관계를 현실로 이끄는 힘이다. 

계속해서 호흡하고 움직이고 이름 붙일 때 우리는 즐거움을, 생동감과 방향감, 삶에 대한 깊은 확신을 안겨주는 즐거움을 느낀다. 이는 스스로 창조하는 몸의 움직임, 그 숨은 능력을 펼쳐보이는 즐거움이요 자신이 베풀어야 할 것을 스스로 발견해내는 즐거움이다.

237 동물처럼 춤을 추려면 그 동물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익혀야 한다. 상당한 시간을 두고 그 동물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그 동물의 형태와 에너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감각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자신이 관찰한 동물의 움직임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도록 여러 번 시도하면서 자신 안에서 감각과 반응의 유형을 발견해내야 한다. 이렇게 움직이기 시작할 때 움직임은 곧 우리를 만든다.우리는 변화한다. 움직이면서 우리는 조화롭고 민첩하게, 우아하고 힘 있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이렇게 움직이며서 우리는 감각과 반응의 유형을 창조하고 형성하는 자신의 능력을 인식한다. 곧 춤추는 사람이 된다.

자신이 단순히 따뜻한 집 안에서 배불리 먹으며 문제없이 번식에 성공하는 사람으로만 살아가는 거시 아니라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즐거움을 알고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 자신의 자유와 창조력의 근원에 가닿을 수 있는 존재라고 인식한다. 

238 나는 동물에게서 고기를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의 힘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나에게 유익하고 차기 있고 아름다운 것을 존중할 때 내 안에서 일어나는 힘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타자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타자의 춤을 추는 것. 이는 진정한 자신이 되록 이끌어준 타자에게 우리가 진 빚을 인식하는 것이다. 

242 아이들이 젤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젤샤는 고양이 전부를 일컫는 말도, 고양이에 대한 개념을 지칭하는 이름도 아니다. 특별히 고양이 한 마리에게 아이들이 느껴지는 대로 붙인 이름이었다. 아이들이 선택한 이름이 곧 아이들이 바라는 고양이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여주면서 아이들은 자신이 바라는 사람, 즉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 그러한 세계에세 살고 싶은 욕구를 표현했다. 

243 아이들이 그리워한 것은 젤샤 자체가 아니다. 젤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아이들은 젤샤와 관계를 맺으며 얻게 되리라 예상했던 즐거움, 젤샤에게 먹이를 먹이고 털을 다듬어주고 보살펴주는 등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얻을 줄 알았던 즐거움을 그리워하는 것이었다. 

그런 즐거움 때문에 아이들에겐 젤샤가 필요했다. 그 때문에 젤샤에게 이름을 붙여준 것이었다. 그 때문에 젤샤를 사랑한 것이었다. 그래, 당신에게 이름을 지어 부른다. 나에게 뜻깊은 사람이기에. 당신은 나에게 무언가 의미를 남기기겡, 내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아니기에 나는 당신에게 이름을 지어 부른다. 당신이 나를 움직인다. 당신에게 이름을 지어 부르면 나는 당신에게 진 빚을 인식한다. 

당신을 알아보는 힘, 당신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고 당신에게 반응하는 힘, 당신을 향해, 당신과 함께, 당신 때문에 움직이는 내가 되는 힘이다. 

244 이름을 지어 부르는 힘은 곧 사랑의 힘이다. 이 말에는 극단적인 뜻이 담겨 있다. 어떤 사람을, 장소를, 동물을, 신을 당신이라 이름 지어 부를 때, 나는 당신과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당신이 무성히 자라도록 나를 바친다. 

당신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움직임이 곧 진정한 내가 되는 움직임이다. 춤을 추며 나의 춤을 춘다. 내가 사랑하는 세계, 나를 사랑하는 세계를 현실로 만든다. 당신에게 이름을 부여하며, 나는 당신을 살게 하는 내 의무에 경의를 표한다. 

246 단어 역시 몸짓이라는 사실을 도로 깨닫게 된다.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도 하나의 춤사위라는 사실을 기억해낼 수 있다. 

247 움직임이 우리를 만든다. 즐거움이 갈 길을 안내해준다. 

움직임을 통해 계속해서 움직이고 성장하며 진정한 자신이 되는 즐거움이 우리 안에서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감각을 일깨워 준다. 

248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세계에 이름을 부여해, 그 세계를 현실로 만들어라. 이 놀이는 진지한 것이다.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250 무얼 해야 하는지 나는 안다. 나를 침울하게 만드는 감정을 타고 아픔의 정수까지 내려가 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숨을 쉬며 근육과 인대와 뼈에 금빛, 장밋빛, 보랏빛, 초록빛의 파장을 투과해 보낸다. 

251 끝을 못 내면 어쩌나 지나치게 염려한 나머지 내가 전과는 다르게 움직인다고 알리는 몸의 감각을 외면한 것이다. 

252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이 감각을 기꺼이 받아들여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이끌어줄 안내자로 삼아야 한다. 숨을 천천히 들이쉬며 심장 깊숙이 내려보낸다. 

두려움, 의심, 문화적 관습,내가 이미 나를 활짝 열어 다시 배웠다고 생각한, 어린 시절 주입된 생각과 다시 만났다. 그러면서 어떻게 몸의 소리를 듣겠다는 거야? 더 깊이 숨을 쉬며 육체적 자아를 땅으로,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받쳐주고 지지해주는 땅으로 내려보낸다. 

253 연이어 일어나는 충동이 고통의 언저리를 유유히 따가라다 조금이라도 찌르는 감각을 느끼면 이내 물러서고 가능한 감각을 열어젖힌다. 

254 내 몸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이 곧 나를 만든다. 내 움직임이 나를 만든다. 

나는 전과 다른 사람이, 몸의 통증에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반응하는 사람이 되었다. 움직임을 통해 치유의 근원을 찾아내는 사람이 되었다. 

255 나는 쓰고 싶은 책을 쓸 것이다. 그리하여 내 꿈을 따라 춤을 추고 움직이고자 하는 이 욕망을 존중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은 아직 알지 못했다. 

259 이제 춤을 추고 쓰고 싶은 책을 쓰고픈 내 욕망을 따를 시간이다. 몇 주 동안 침대 위에 틀어박혀 있지 않았더라면 이런 준비는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내 앞을 막아서서 나를 주춤거리게 하고 울적하게 만들었던 통증이 결국은 내 경험을 바꾸는 촉매제가 되었다. 덕분에 나는 춤을 출 수 있는 상황을 좇아 좀더 확신을 품고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믿기 힘들었다. 몸이 아팠던 덕분에 나는 그동안 목표를 좇는다며 기대온 생각과 움직임, 마음으로 몸을 억누르는 생각과 움직에서 자유로워졌다. 통증은 나에게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모아 불만 깊숙이 박힌 충동을, 움직이고픈 내 안의 충동을 깨달으라고 다그쳤다. 

260 영혼의 욕구가 말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아픔의 의미가 바뀌었다. 아픔은 내게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하라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라고 소리쳤다. 고마움을 표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265 어떻게 할지는 몸이 알고 있어요. 자기 몸을 믿으세요.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세요. 몸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266 이번만큼은 분만하는 순간의 내 느낌을 몸이 직접 감각하고 반응하면서 나를 건강과 행복으로 이끌어주리라 믿을 것이다. 

271 고통을 느끼는 것은 출산을 원하기 때문에, 출산의 방법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고통이 아기를 몸 밖으로 내보내고 싶다는 욕구를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고통을 이러한 표현으로 받아들인다면 고통이 이끄는 대로 움직여 아이를 세상으로 내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73 극심한 통증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는 순간,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뿐일 때, 고통은 우리에게 관계의 망 안으로 들어가, 그 순간을 비롯해 앞으로 다가올 여러 순간마다 우리의 삶을 자라나게 해줄 관계의 망 안에서 함께하라고 외친다. 잊지 않을 거야. 출산의 고통이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나는 관계의 망에서 전적으로, 완전히 의존하는 사람이다. 그 안에서야 나는 진정한 나 자신, 끝없이 변화하는 육체적 자아가 될 수 있다. 

274 스스로 초래한 고통은 아프다. 스스로 초래한 고통은 그 아픔에 뒤틀리는 몸을 지텨보면서 자신이 아는 방법으로 만족을 추구하려고 한다. 그 찌르는 듯한 아름이 곧 고통의 힘을 증명한다. 스스로 초래한 고통의 결과 창조된 아름다움은 부서진 콘크리트 틈 사이로 자란 풀과 같다. 아름다움이 드러났다고 해서 감각을 짓누른 고통이 정당화되지는 않는 것이다. 

276 우리가 진정한 자신이 되기 위해 타인의 몸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하나의 몸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나면 자신의 고유한 힘을 발견할 수 있다. 태어나고 호흡하는 육체적 자아의 힘이란 자신의 육체에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언제든 할 수 있는 힘도 아니요, 타인의 육체를 자신이 명하는 대로 다스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타인의 육체를 자신이 명하는 대로 다스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육체적 자아의 힘은 자신을 지탱하고 자극하며 움직이는 육체로 태어나게 하는 관계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다. 

안에서 비롯된 우울과 좌절감이 소리친다. 이런 힘을 네 안에서 끌어내봐. 지금 당장. 

278 "우린 언제나 흥얼거릴 기분으로 지내야 돼! 그렇지 않을 때는 그 널빤지 따위는 내려놓고 기분이 괜찮아질 때까지 서로 껴안아주면 되는 거야. 문제 될 건 하나도 없어. 아무것도, 중요한 건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거야!"

279 이것은 나도 전혀 예상치 못한 깨달음이었다. 사랑을 위해 이사했다는 것은 곧 그동안 우리가 나눈 사랑이 충분치 않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고통은 사랑을 부르는 소리였다. 널빤지를 내려놓으라는 소리. 평상시 같았다면 나는 욕구가 불러일으킨 고통에서 달아나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거나 집안 어느 구석에 가서 웅크리고 있거나, 아니면 가로세로 퍼즐에 정신을 쏟은 채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280 흥얼거릴 기분이 들 때까지 껴안고 있기. 

281 돈과 시간과 에너지만 들이면 다른 사람에게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전해듣고, 고통을 쫓아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을 제공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는 데 있다. 이런 시점에서 삶을 충만하게 만들어주는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호흡 순환이다. 움직임에 대한 감각의 인식을 끌어들이겠다는 목적으로 호흡 순환을 하게 되면 욕망과 고통에 대한 경험 또한 변화한다. 

282 우울은 언제든 찾아와 우리를 늪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그런 상황이 오면 우리는 꼼짝도 할 수 없다. 

우리가 놓친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때도 있지만 모를 때도 많다. 슬픔에 잠기거나 적의 어린 흐리멍덩한 무관심 앞에 방치된다. 이런 기분은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우울이 나의 온 존재를 잠식할 때 처음 나타나는 반응은 우선 감정을 부인하는 것이다. 몸을 다스리는 마음을 밀고나가면서 자신을 일깨워줄 자극을 찾는다. 자신이 즐겨 하던, 기분이 좋아지곤 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것이 잘 안 되면 감각적 자아를 흥분시키면서 우울한 기분을 가라앉힐 수 있는 무언가에 손을 뻗는다. 그 대상은 잘 차린 음식이나 흥분되는 성적 접촉, 혹은 고요한 어둡 속에 잠겨 있던 신경을 깨울 빛과 소리의 홍수가 될 수도 있다. 

청소가 될 수도 있다. 어질러진 것들을 정돈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도 우울한 기분이 남아 있다면 약물이나 알코올로 기분을 잠재우려 한다. 

283 이러한 노력 끝엔 당분간 안정을 취하면서 무거운 짐을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는 있겠지만 우리를 우울의 늪으로 빠뜨리는 어두음 대게 다시 돌아온다. 전보다 더욱 무겁게, 무엇으로도 뚫리지 않을 듯 빽빽이 들어찬 어둠. 꼼짝하지 못한다. 이렇게 밑도 없이 나락으로 빨려 들어가는 감정을 멈춰세울 수 있는 것이 바로 호흡 순환이다. 

신경은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히거나 근심걱정에 뒤틀릴 때에도 집중할 수 있다. 아무것도 할 기분이 아니라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해도 숨은 쉴 수 있다. 숨을 쉬면서 신경을 호흡으로 내려보내 자신의 감정에 응답할 수 있다. 우선 땅과 함께 호흡하며 숨이 그저 지나가도록 내버려둔다. 심장으로 숨을 들여보내고 내쉬기만 할 뿐 자신을 지탱하려고 했던 노력은 거두어들인다. 모두 내려놓은 채 숨이 몸을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려가게 한다. 

우리는 땅에 기댈 수 있다. 떨어지지 않는다.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 그저 숨만 것으로 족하다. 


284 이런 순간, 호흡 순환을 통해 우리는 휴식을 취하고 온전히 존재한다. 우리가 자기 자신임을 확신해주는 작지만 안전한 공간이 열린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 있는가.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이 바로 나야. 자신과의 싸움을 멈춘다. 난 지금 있는 이곳에서만 시작할 수 있어. 난 여기 있어. 바로 여기, 이곳에. 다시 밀어올리며, 땅은 우리에게 결핍된 견고함, 무게감을 전한다. 그 감각에 몸을 내맡긴다. 

상품을 비교하고 조사하는 소비자로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지며 그 답을 알고 싶어 한다. 이 믿음이, 이 관습이, 이 길이, 이 관계가 고통을 틀림없이 없애줄 수 있는지, 그렇게 갈망하던 생동감과 방향감, 소속감을 가져다줄지 알고 싶어 한다. 우리는 사실을 아는, 정답을 아는 사람이 되고자 갈망한다. 자신이 아는 사실로의 삶의 끝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해도 개의치 않는다. 

진실을 바로잡고자 명백한 진실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면서 자신의 감각적 자아와 분리될 때 근육과 감정은 긴장되고 욕망의 지혜에 다다르는 길은 가로막힌다. 자신의 믿음을 지탱해줄 권위자들에게 점점 더 의존하게 된다. 

285 우리가 믿고 의지할 땅은 오로지 우리 안에 있다. 호흡을 통해 감각적 인식의 통로를 열어 자신과 맞닿아 있는 땅을 느끼는 것이다. 

호흡한다. 다시 태어난다. 주의를 기울인다.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해주는 세계에 이름을 붙이며 이 세계를 현실로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고통이다. 이 고통을 존중할 때만이 우리에게 유효한 확신을 얻을 수 있다. 

땅으로 숨을 내려보내고 다시 숨을 쉬며 이번에는 그 숨을 피부를 통해 공기 중으로 내보낸다. 주의 깊게 자신 안에 드나드는 숨을 따라간다. 피부가 공기 속에 녹아든다. 공기는 피부로 스며든다. 

다시 숨을 쉬며 불편한 감정의 뿌리까지 쫓아 내려간다. 우리는 자신에게 없는 무언가를 원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가? 왜 원하는가? 몇 가지 가능한 대답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음식. 접촉. 확신. 위로. 안정. 목적. 압박감이 우리를 억누른다. 못하겠어. 못할 거야. 시간이, 돈이 없어. 당치도 않지. 다 잘못됐어. 자신을 억누르는 무언가에 미련이 남아 있는데 그 미련을 떨쳐낼 수가 없다. 

숨을 쉬며 고통을 열어젖힐 때 고통에 대한 감각도 변화한다. 내가 만드는 움직임이 곧 나를 만든다.

286 내 움직임이 나를 갈라놓는다. 갈등. 나 자신과 싸움을 벌인다. 통제불능. 공허함. 무력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어. 빠져나갈 길도 없어. 이러한 관점이 열리면 그에 대한 감각도 변화한다. 나는 어떤 움직임을 만들었는가, 그 움직임으로 나는 어떤 기분을 느꼈는가? 
 자신이 얼마나 피곤한지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업무에 얼마나 파묻혀 있었던가. 삶의 온갖 소음과 혼란 속에서 얼마나 정신이 혼미해졌던가. 무뎌진 감각의 벽 안에 얼마나 갇혀 있었던가. 자신의 나약함에 절망해서 폭발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지도 모른다. 자신을 압박하거나 포기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무엇을 선택할 수도, 잃을 수도 있다고 배운 우리는 욕구가 즐거움에 관한 것이라고, 만족이란 즉각적인 것이며 자신은 특정한 대상을 원하는 것이라고 믿게 된다. 
 그러나 이들 중 어떤 것도 진실이 아니다. 즐거움은 길잡이일 뿐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욕구의 대상과 관련하여 움직일 때, 그러면서 건강과 행복을 찾을 때 우리는 즐거움을 느낀다. 즐거움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면 즐거움을 잃고 만다. 
 목적은 우리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좇으며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 그 자체다. 물질이나 사람, 가르침이나 훈련 등을 통해 움직이는 법을 배울 때면 우리는 그 변화와 관계를 맺고 그 관계의 도움을 받아 육체적 자아로 거듭나는 즐거움을 맛본다. 혹은 아니기도 하다. 

갈망의 에너지인 욕구는 우리가 계속해서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끊음없이 그 모습을 달리한다. 

287 욕구의 모습이 곧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우리가 감각하고 반응하면서 움직이는 모습이 우리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욕구 혹은 무언가를 갈망할 때 느끼는 고통이 우리에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자신만의 잠재력을 펼쳐보이라고 재촉한다. 우리 안에는 좌절감으로 절규하며 태어나길 기다리는 움직임이 있다. 
 욕구를 따라 움직이면 마음으로 몸을 지배한다는 사고를 견지하는 입장에서 욕구를 다스리면서 무엇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깨닫게 된다. 욕구에 따라 움직이며 우리는 인내하고 겸양하며 수용하는 법, 정직을 사랑을 실천하는 법을 배운다. 

 숨을 땅으로 내려보내고 피부와 맞닿은 빛 속으로 내보낸 뒤 뱃속의 요람으로 다시 숨을 불어넣는다.  

288 에너지가 흐르면서 우울, 근심, 절망감이 더욱 심해질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둠이 더욱 뚜렷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호흡하면서 움직이면 나는 고통을 선물처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야. 

 

제대로 된 것 하나만 찾으면 난 행복해질 거야. 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도 자연스레 알게 되게지.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도 알게 될 거야. 그런다면 행복해지겠지, 그럴 때면 행복해질 거야. 이것은 망상이다. 세계에는 우리가 갈 수 있는 길이 세트메뉴처럼 미리 준비돼 있는 것이 아니다. 

 

289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진작부터 알게 된 사람도 있지만 굽이져서 아을 내다볼 수 없는 길 앞에 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 

 

 정신적 욕구는 재능과 능력으로 엮인 망만큼이나 풍성하고 복잡하게 얽히고 짜여 있다. 자신에게 들어맞는 단 하나의 장소를 찾으려고 한다면 감각의 인식과 다시 한 번 분리되는 것이다. 

 

 주의를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기울여야 할지 스스로 선택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체적인 감각을 즐기고 누릴 때에도 우리는 이 감각을 느끼게 해준 관계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사실을 완벽히 인식한다. 그렇게 자신의 의무를 알아간다. 우리는 즐거움과 고통 속에서 삶이 충만해지는 세계를 어떻게 창조해내는지 끝없이 일러주는 감각의 인식을 보살펴야 한다. 

 

다시 숨을 쉬며 불꽃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욕망의 심장부까지 파고든다. 무엇을 원하는가? 무엇이 결핍되었다 느끼는가? 자신 안에서 만들어졌으면 , 하고 간절히 바라는 움직임은 무엇인가? 

 

290 아직 탐험되지 않은 즐거움은 무엇인가? 

 

다시 숨을 쉬며 숨을 깊이 내려보내고 뱉어난다. 모두 내려놓고 기다린다. 곧이어 무언가가 어렴풋이 드러난다. 처음에는 바라는 것이라곤 먹는 일뿐이라 느낄 것이다. 불쾌한 감정이 머릿속 어두운 구석을 채운다. 성적 쾌감이 물밀듯 밀려와 자신을 데리고 가주길 원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숨을 쉬면, 이러한 욕망을 억누른 채 조금 더 뚜렷한 사실을 바라면 불쾌한 느낌은 다른 쪽으로 휘어진다. 즐거움, 건강과 보조를 맞추는 새로운 움직임이 드러난다. 만족감을 안겨줄 무언가를 갈망한다. 무언가를 베풀어야 한다면 그 베풂이 반드시 필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 될 수 있는 장소를 찾고자 갈망한다. 뿌리 깊은 만족을 안겨주는 삶으로 들어가기를 갈망한다. 

 

뱃속 깊숙이 숨을 내려보내 창조적인 불씨에 불을 지피면서 우리는 진실을 감지하게 된다. 정해진 길은 없다. 그곳에 다다들 사다리도 없다. 결국 받게 될 상도 없다. 정복해야 할 경쟁상대도 없다. 

 

291 깊은 관계에 다다르기 위해 우리는 감각하는 자아 안에서 일어나는 충동들, 움직이길 갈망하는 미미하고도 무수한 충동들만 끌어내면 된다. 자신만의 꽃을 피워내면 돈다. 이러한 생각들이 위로가 된다. 처음 일어난 움직임은 옴짝달싹 못할 것 같이 아주 미미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럴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숨을 쉰다. 자신의 호흡에 신경을 모은다. 자산 안에 흐르는 사람의 흐름과 그 구성을 존중한다. 달리 할 일은 없다. 문제 될 것도 없다. 

 

물과 함께 호흡하며 우리를 지나쳐 흐르는 에너지가 움직이려는 충동을 맞아들인다. 고통에서 가능성의 싹이 돋아난다. 친구가 읽어보라고 추천해준 책을 기억해낸다. 다음 주말에 하는, 보고 싶었던 공연을 떠올린다. 빽빽한 숲 속으로 들어가 오래도록 힘차게 걷고픈 충동이 인다. 요가수업을 받고픈 충동도 일어난다. 잡지에 글을 기고하거나 그림을 그리고 옷장을 정리하고픈 충동을 느낀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눠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종교집단에 찾아가보겠다고 다짐해본다. 빵을 좀 구워야겠다고 생각한다. 

 

292 무엇이 됐든 상관없다. 처음에는 이러한 충동에 반응을 하느냐 마느냐조차 문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충동을 인식하면서, 4대원소와 맞닿은 감각적 자아를 세심히 보살피고 존중하면서, 자신이 호흡하며 만들어낸 움직임을 통해 움직이고픈 충동을 느끼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스로 그 충동을 따라가고자 한다면, 자신이나 타인과 관련된 움직임을 일으키고자 한다면 기존의 감각은 금이 가면서 변화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성장한다. 눈앞에 열리는 길과 아직 건너지 않은 도전의 다리를 감지하며 진정한 자신, 유일한 자아를 풀어헤친다. 지금 이곳과 가야 할 곳 사이의 간극을 고통스럽게 느끼며 고개를 돌려 외면할 수도 있다. 그 간극을 느끼며 자신을 원망하고 반성하거나 아직 얻지 못했다고, 아직 가닿지 못했다고 스스로 비난을 퍼부을 수도 있다. 

 

293 혹은 이러한 욕구가 곧 자신을 만드는 움직임이라 감각으로 인식하고 나면 채우지 못한 욕구를 아직 펼치지 못한 즐거움을 안겨줄 반가운 손님이라며 이를 기쁘게 맞아들일 수도 있다. 채우지 못한 욕구가 우리를 자유 깊숙이, 아직 향하지 못한 소망의 대지 저 멀리 데려다주리라, 그 결실의 씨앗을 어떻게든 실어다주리라 믿게 될 것이다. 

 한 번 발을 내딛고 나면 이것은 결코 끝나지 않는 여정이다.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쉼 없이 탄생하고 변화한다. 그 여정을 따라가는 매 순간, 영혼을 향한 욕구는 우리에게 그 순간에 충실히 파고들라고 베풀어야 할 것을 성심을 다해 베풀라고 소리친다. 

 

제시간에 틀림없이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 궁극적인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적 욕구를 계속해서 만족시키지,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294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답을 찾아나설 때 우리 앞에는 현혹적이고 압도적인 선택지들이 놓인다. 

 

무수한 선택지들 간의 차이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공통점이다. 

 

각각의 유형을 마주한 우리는 자신 안에서 그들이 나타내는 움직임을 발견한다. 

 

295 그 움직임을 몸을 지배하는 마음의 감각을 키우는 것일 수도, 일상 속에서 명상을 실천하는 것일 수도, 약속의 땅에  대한 환상을 믿는 것일 수도 있다. 

 

특정한 믿음이나 관습을 따라 움직이려는 시도가 자신 안에서 즐거움이나 기쁨 치유의 불꽃을 피워올리면 우리는 그 즉시 그러한 상징이나 가르침, 관습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도 그것이 바로 진실이다. 그것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은 무엇이 되고 싶은지가 불현듯 떠올랐으니 이러한 상징이나 가르침 관습이 자신에게만큼은 사실이요 진실인 것이다. 우리의 움직임이 관계의 망을 창조하고 그 안에서 자아가 펼쳐지는 것이다. 

 

296 호흡하여 움직이고 움직여 호흡하면서 우리는 그 이유를 깨닫는다. 무엇을 믿는다고 해서 자신을 굳걷히 지탱해줄 땅을 얻는다거나 고통에서 무사히 풀려난다는 보장은 없다. 믿고 실천하면서 우리는 어디에서도 할 수 없는 일, 즉 감각훈련을 한다. 

 

믿고 실천하면서 자신 안에 일어난 변화를 직접 목격하며 변화하는 자신의 능력을 깨닫는다. 

 

우리는 언제나 변화하는 육체다. 

 

우리는 줄곧 무언가를 믿는다. 삶을 풍요롭게 해주리라 생각되면 그것이 무엇이든 믿는다. 신은 진짜 있어. 신은 내 안에 살면서 진정한 나 자신이 되게 해주거든. 

 

호흡하고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활기를 되찾고 숨은 자아를 불러내어 넘치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한 자신이 되게 해주는 이 대상을 우리의 종교, 우리의 믿음, 우리의 관습이라 이름 붙인다.

 

297 자신을 진정으로 존재하게 해주는 이 대상이 살아 숨쉬도록 헌신하게 된다. 

 

각기 다른 재능과 능력을 타고난 사람들은 자신을 창조하는 힘을 저마다 다른 상황에서 발견한다. 이성이 발달한 사람들은 논리적인 논쟁이 가능한 상황에서 즐거움과 진실을 찾는다. 감정적인 삶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헌신과 사랑을 강조하는 종교적인 삶을 살고자 한다. 역동적인 움직임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감각은 움직이는 능력을 발휘하여 대상을 감별할 수 있는 믿음이나 관습에 이끌린다. 

 무엇이 됐든 어떠한 움직임을 통해 진정한 자신으로 거듭하게 하는 관계에 이름을 붙이고 그 관계를 현실로 만들 수 있다면 그 움직임, 그 움직임에 이르는 길이 곧 진실이다. 

 우리는 복잡한 존재다. 우리의 몸은 신비로 가득 차 있다. 우리 안에는 가능하리라 상상조차 못했던 감각과 움직임이 존재한다. 

 

자신 안에서 욕구에 대한 반응을 일깨우지 못한 채 몇 년을 허비할지도 모른다. 각고의 노력을 다해 한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결국 새로움이나 기쁨은 맛보지 못한 채 샛길로 빠져들지도 모른다.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이끌어내야 할 움직임은 그 어떤 합리적인 설명으로 묘사하는 것보다 더욱 복잡하다. 

 

298 창조력을 어떻게 일깨울 수 잇는지 알고 이를 말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정신적 욕구, 즐거움과 고통을 느끼는 자신의 감각만이 우리를 우리 가야 할 길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욕망에서 지혜를 감별해내는 것은 우리가 일평생 수행해야 할 과업이다. 

 

나는 왜 이곳에 있는 걸까? 춤을 추고픈 욕구, 내 정신적 욕구는 왜 나를 하필이면 이곳으로 이끌었을까? 나는 춤을 추기 위해, 내 집필작업의 근원인 춤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농장으로 옮겨왔다. 

 

그것이 나의 믿음이었다. 진실이었다. 나는 그에 이름 붙이고 그에 따라 행동했으며 이 진실을 깨닫게 해줄 관계의 망을 창조했다. 

 

299 그럼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아무것도. 나는 춤을 추지 않는다. 춤을 출 기분이 아니다. 부지런히 걷고 요가도 많이 하지만 춤은 추지 않는다. 왜 그럴까? 혼란스러웠다. 조금 괴롭기도 했다. 

 

그저 자연 속에 있다가 나도 모르게 춤을 추게 되는 것이었다. 

 

뛰고 돌며, 하늘 높이 팔을 뻗으며, 뛰어들고 흩날리며 , 구르고 흩어지다가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고픈 갈망이 솟구쳤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내 주변을 둘러싼 것들을 인식하게 되고 아름다움이 나를 움직이게 했음을 알아차린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곳에 왔는가? 

 

여름 내내 푸르던 빛이 가을을 맞아 금빛으로, 주황빛으로 바래고 겨울로 접어들면서 바람에 헐벗은 푸른빛으로, 잿빛으로 변해하는 것을 바라본다. 산등성이에 드러난 속살을 눈에 담는다. 그래도 난 춤추지 않는다. 처음에는 한 길을 따라, 그 길만을 계속해서 걷고 또 걸었다. 그러는 동안 눈앞에서 펼쳐지는 미세한 변화를 감지했다. 하루는 지평선만 바라보는가 하면 다음 날에는 풀잎만을 바라보았다. 어떤 날에는 언덕 등성이의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며 나를 놀라게 했다. 

 

300 더 이상 장대한 광경을 보는 것만을 산책의 목표로 삼지 않았다. 눈에 익은 길을 떠나 배회하기 시작했다. 들판 위로, 뒤로, 옆으로 걷고픈 충동을 그대로 따랐다. 대지는 내게 가르쳐주었다. 나를 누그러뜨리고 열어주었다. 숨을 내려보내고 뱉어내며 들이쉬고 내쉬었다. 감각이 튀어오르고 가라앉았다. 

 

대지를 알아가는 것은 사람의 몸을,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알아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활한 대지에 퍼진 곡선 하나하나를 무한히 탐험한다. 

 

어느 일요일, 내가 춤을 추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괴로운 하루였다. 나는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춤을 향한 열정을 다시 끌어내겠다고 다짐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호흡하여 움직이고 움직여 호흡했다. 따뜻하게 덥혀진 몸으로, 움직이려는 충동이 일어날 때마다 이를 맞아들이고 따라가며 즉흥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301 내가 줄곧 걸어다니던 길이 내 안에서 되살아났다. 놀라웠다. 굽이치는 언덕의 형상이, 그 너머의 광경이 느껴졌다. 하늘에서 구름이 얼룩린 채 내 머리 위로 떠다녔다. 

 

나는 내 안에서 바라만 보는 그 광경의 일부가 되었다. 다른 감각들 피부의 촉각도 생기를 되찾았다. 나는 그림 속에 있고 그림은 내 안에 살아 숨쉰다. 나는 나 자신이요, 대지요, 공기요, 가늘이고 그들 사이의 관계다. 한없이 걷고 바라보던 지난날의 의미를 그제야 헤아릴 수 있었다. 나는 풍경과 소리와 냄새에, 햇빛과 대지와 하늘에 젖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내 움직임이 자아내는 감각과 생각과 감정에 스며들고 있었던 것이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나는 내가 바라던 댄서가 되고 있다. 그래! 나는 속으로 외쳤다. 이게 바로 내가 바란 것이었다. 바로 여기에 나는 이름을 붙인 거야. 바로 이 순간을 나는 현실로 만들려 했던 거야. 방금 전에는 지금과 달리 움직이고 있었던가? 저녁은 무얼 먹을지, 해야 할 일은 뭐가 있는지 걱정하느라, 아프고 고통받느라, 낮잠시간이 자꾸만 변한다고 신경 쓰느라 온 정신이 사로잡혀 있던 때에는 지금과 달리 움직였던가? 

 

302 대답하기 힘들다. 느낌만큼은 분명 다르다. 이것만은 알고 있다. 내가 만든 움직임은 나를 움직이게 한 대지의 무언가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춤을 추는 나의 움직임이 자연과의 관계를 현실로 끌어들였고, 그 관계 안에서 나는 춤을 추는 능력을 펼쳐놓았다. 이 관계는 내가 움직이도록 영감을 불어넣었다. 즐거움이 인다. 그 즐거움은 나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을 놓아주라 한다. 

 

망상과 꿈 사이를 가르는 선은 무엇일까? 새로운 세계와 가치, 신에 이름을 부여하고 이들을 살아 숨쉬게 하는 창조적이고 윰체적인 과업과 비현실적인 환상 사이의 경계는? 

 

그 좋은 직업 다 놔두고 왜 농장으로 간다는 거야? 왜 하필 집에서 아기를 낳는다는 거지? 누구에게는 그러한 세계는 삶이 마땅히 따라야 할 길과 어긋나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그러한 세계는 마법이나 마찬가지다 

 

303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을 넘어 창조해야 한다. 

 

그런 희망도 없이 생을 지탱해나가려면 신경안정제나 알코올에 의지해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먹지도 않을 것이고 성관계도 그마둘 것이며 삶을 사랑하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부정의 연쇄현상. 그런 상황에서도 바라는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아니다. 

 

욕망을 따르는 우리의 자유는 욕망 자체에서, 욕망이 자아내는 리듬에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환경에 내재한 힘에서 비롯된다. 

 

그 세계에서 사람들은 애써 굶주린 끝에 자신이 더 강해졌다고 주장한다. ... 자기 몸에 상처를 내고 낙인을 찍는 등 자해를 한 뒤에 이러한 행동이 자신의 삶에 의미를 안겨준다고 주장핸다. 서로에게 거짓말을 일삼은 뒤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서로 하대한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이런 세계는 무엇이 잘못된 걸까? 

 

 

 

304 지혜를 가려내는 몸의 가장 기본적인 수단을 억누르면 세계에 베풀어야 할 것을 자유롭게 풀어줄 수 없다. 자유로이 살아가야 하는 의무, 육체적 자아가 탄생하도록 자유로이 놓어주어야 할 의무를 외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처럼 외면당한 육체는 반란을 일으킨다. 반란은 처음에는 조용하게 시작되지만 점점 거세게 일어난다. 

 

이에 맞서 우리는 의지력을 더욱 굳건히 다져야겠다고 다짐한다. 자제력을 키워줄 상품을 사들인다. 제멋대로인 욕망을 개조해주겠다고 약속하는 상품과 절차, 믿음과 관습을 사들인다. 

 

무리하게 시도하다 이내 지쳐버린 끝에 어김없이 손을 놓는다. 그러고는 즉각적인 만족을 찾아나선다. 패스트푸드를 먹고 하룻밤의 정사를 나누고 성급한 판단을 내린다. 그리고는 수치스러운 마음에 채찍을 더욱 거세게 휘두르면서 제멋대로인 욕망들을 다시 선 안으로 끌어모은다. 

 

망상과 꿈은 어떻게 다른가? 망상을 좇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을 무디게 하고 마비시키며 압도한다. ... 꿈을 좇는 사람들은 감각을 열어젖히고 자신을 만드는 움직임에 반응하며 이러한 움직임이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세계를 끌어들이는지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운다. 

 

욕망의 지혜를 따라 움직이는 법을 익히는 데 고통이 따를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고통 자체는 목표도 아니요 목표에 이르는 수단도 아니다. 우연한 것도, 필수적인 것도 아니다. 

 

고통은 더욱더 충만한 창조력과 자유, 사랑을 펼치기 위한 신호로 드러난다. 우리는 움직이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움직이기 위해 움직임에서 즐거움을 찾기 위해 끝없이 변화한다. 지나치게 피로하거나 배가 고프거나 외롭거나 자기 자신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움직임을 바라고 갈구한다. 움직일 때 우리는 호흡한다. 호흡할 때 느낀다. 느끼는 그 순간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며 욕망이 품은 지혜를 경험한다. 지각하는 대상이 변화한다. 지각하는 우리 자신도 변화한다. 욕망 역시 궁극적인 즐거움과 건강을 위해 필요한 것들과 보조를 맞추며 점점 더 변화한다. 

 

이제 움직일 시간이다. 

 

 


307 호흡 순환 익히기. 호흡이 우리는 만든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지혜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래도 지혜를 초대하여 맞이할 수는 있다. 감각을 열고 인식을 몸 안으로 끌어들이면 된다. 감각을 되살리는 것이다. 감각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간단한 실천 방법. 

 

호흡. 이것은 두 가지 움직임이 자아내는 리듬이다. 들이쉬고 내쉰다. 횡경막이 내리눌리며 진공상태가 된다. 공기가 빨려 들어가며 폐를 채운다. 횡경막이 내려갔다 도로 튀어오르면서 공기를 토해내고 몸 안의 압력을 밖의 압력과 맞춰 되돌려놓는다. 

 

308 공기가 빠져나가면 몸은 필요없는 불순물과 잔여물, 긴장과 스트레스를 함께 내보낸다. 이렇듯 삶의 순간순간, 호흡이 우리를 만든다. 호흡이 우리를 창조한다. 우리는 감각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진정한 우리 자신이 된다. 호흡하는 매 순간, 우리는 자기 자신을 만들어나간다. 이렇게 우리는 만들어진다. 

 

의식이 관여하지 않아도 몸이 움직이듯 호흡을 당연한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호흡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느낀다는 사실도 잊는다. 느낀다는 사실을 잊으면 자아에 대한 내적 감각도 흐릿해진다. 

 

309 내적 감각이 희미해지면 우리는 포화상태에 이른 자극 앞에서 먹잇감으로 맥없이 전략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며 욕망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를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는 목소리들의 포로가 된다. 그래서 몸을 몸에 들어맞지 않는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물체로 간주하게 된다. 

 

호흡할 때 우리는 감각한다. 감각할 때 우리는 인식한다. 감각의 인식이라는 자신 안의 우주를 활짝 열어 그 우주 안에서 욕망을 맞이하고 욕망의 안과밖을 뒤집을 수 있다. 

 

우리 자신이 만드는 움직임, 즉 호흡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된다. 

 

호흡을 통해 자신이 땅과 공기, 불, 물과 연결되었음을 경험할 것이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깊이 있게, 만족스럽게 호흡할 것이며 눈앞에 닥친 도전과 기회들과도 적절히 어우러질 수 있게 될 것이다. 

 

호흡 순환을 통해 삶의 매 순간, 자신에게 알맞은 진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감각의 인식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느끼든 어디에 있든 충만하고 매혹적인 삶을 이끌어갈 길을 찾에 될 것이다. 그로써 욕망의 지혜를 분간하게 될 것이다.

 

310 몇 시간 뒤, 이 모든 일에 흥미가 가시기 시작했다. 한 시간전까지만 해도 나를 생기 있게 만들었던, 아기의 보드라운 살갗 아래 비치는 혈관에도, 내 포옹으로 편안함을 되찾은 아이의 옅은 미소에도 더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감각이 시들해졌다. 생각의 흐름도 멈춰버렸다. 설탕이나 카페인, 무언가 짜릿한 것이 필요했다. 내 또래의 사람이, 자극이나 격려가 필요했다. 생생한 접촉이 필요했다. 삶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311 이럴 때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안다. 움직여야 해. 내 몸에 영양분을 공급하고 감각의 인식을 휘저어 깨우고 사랑을 전해주어야 한다. 가장 쉬운 것은 걷기. 물론 단순히 산책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잊어도 좋을 망각으로 내 안을 채우고 기분을 가라앉게 만드는 이 지루함을 그만 떨쳐내고 싶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내 욕망, 헝클어지고 얽히고 뒤죽박죽된 내 욕망이 갈 길을 말해주고 있다. 

 

얼마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집중해서 걷고 나니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허기가 배를 찌른다. 돌아가 무언가를 먹고 싶다. 하지만 허기는 어느새 물러난다. 내가 단순히 먹을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감각이 되살아나면서 깊고 통렬한 아름을 느낀다. 이것이 내 몸이 아는 사실이다. 허기는 감각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는 첫 번째 신호인 것이다. 

 

312 나뭇가지를 가져다 그 앞길을 막아놓는다. 물러서. 하지만 침입자인 그 설상차가 알아차리기나 할는지.

 

계속 걷는다. 몸이 이뜨는 대로, 나는 연못가를 지나 언덕 꼭대기로 올라선다.  

 

313 그러고는 드러눕는다. 기다려봐. 여기서 무엇을 볼 수 있지? 이렇게 넘어져서 내가 볼 수 있는 건? 구름을 바라본다. 하늘을 떠다니는 흰빛, 푸른빛, 잿빛 조각들. 얼룩덜룩한 빛깔이 켜켜이 쌓인 채로 스쳐 지나가다 이내 투명한 명주실처럼 가늘어진다. 

 

까마귀다. 나를 보면 내가 먹잇감인 줄 알려나? 압박감이 심장을 조여온다. 문득 슬픔이 밀려온다. 내 친구. 그녀의 갓난아기. 다운스에서였지. 친구는 아기를 유산했다. 

 

드나드는 숨이 이 아픔을 구름의 빛깔 속으로, 눈의 스산함 속으로, 대지의 고요한 정적 속으로 흘려보낸다. 아름다움이 나를 에워싼다.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다. 뛰고픈 충동이 다시금 밀려온다. 

 

314 이곳이 필요해, 이런 산책, 여기를 걷고 싶어. 나에게 내 자아를, 내 삶을 다시금, 또 다시금 열어줄 이 땅이 필요해. 

 

다시 달바우로 돌아가 그 굽은 등에 몸을 기댄다. 바위의 무게를, 그 위에 얹으 내 무게를 느낀다. 바위와 만나 나는 나 자신으로, 내가 살아 있는 몸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 몸 자체가 된다. 사랑의 떨림이 울려퍼진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태양, 저 보드라운 노란색 공이 나무숲에 걸터앉아 있다. 눈이 푸른빛, 황금빛으로 반짝인다. 생기로운 빛이 손짓하는 듯하다. 나를 따라왔던 사슴을 이제는 내가 따라간다. 생각이 스치듯 날아간다. 이 산책을 글로 옮겨야겠다. 이 순간들을 되새기고 기억하고 생각 속에 집에 넣어 나의 사상을 다시 정리해 이 움직임의 경험을, 여이 이곳에서의 경험을 그 안에 담아야겠다. 

 나의 움직임과 걸음, 호흡과 느낌과 생각이 나를 만든다. 움직임을 따라 나의 감각과 반응이 열리고, 나는 이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누군가가 된다. 이 깨어 있는 생동감을 감각하고, 감각할 수 있으며, 감각하고자 바라는 누군가가 된다. 이것이 바로 나 자신이다. 

 집으로 들어선다. 시든 꽃다발이 한아름이다. 꽃다발을 신문지 위에 올려놓는다. 눌러서 말려야겠다. 배도 고프고 피곤하다. 무언가를 먹고, 글도 쓰고, 무언가를 만들고, 제프와 대화도 누나고, 카이도 돌봐야 한다. 

 

 산책으로 열린 감각의 공간에 숨을 불어넣는다. 활기에 차 행복해진 나는 순간의 즐거움을 찾았다. 

 

315 수영으로 배운 호흡 순환법 

 

316 매 호흡을 한 가지 원소와 연관 지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매 순간 호흡할 때마다 내 안에, 나를 둘러싼 세계에 존재하는 각 원소들과 나 자신의 관계를 탐험하게 된다면? 공기, 공기가 필요해. 고개를 돌려 숨을 들이마시며 공기의 파도가 몸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모습을 상상한다. 

 

 불. 다시 숨을 쉰다. 이번에는 숨을 뱃속의 불씨에 내려보낸다. 아랫배 근육을 수축하고 골반 바닥에서부터 밀어올리면서 아랫배를 내리누른다. 뱃속을 비운다. 텅 빈다. 아무것도 없다. 나는 움직임이 피워낸 순수한 불꽃이 된다. 중심을 끌어당기자 나의 몸은 다시 늘어난다. 머리끝은 앞으로 나아가고 발끝은 뒤고 뻗어나가며 등허리는 한층 더 늘어난다. 

 

317 힘을 그러모아 앞으로 나아갈 준비를 한다. 

 

다시 숨을 쉰다. 이번에는 물, 물을 생각한다. 뱃속의 불꽃이 액체로 변해 휘젓는 팔다리로 흘러간다. 힘이 느껴진다. 몸이 물결친다. 

 

싱긋 웃는다. ... 이 느낌을 오래 붙들고 있을 수가 없다. 

 

숨을 한 번 쉬며 내리누르는 파도를 땅 삼아 몸을 내맡긴다. 그 다음 호흡에서는 공기 같은 빛으로 몸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척추 밑바닥의 공간에 모든 감각을 밀어넣는다. 그 다음, 타오르는 불꽃을 녹아내리는 용암으로 변모시켜 몸통과 등, 팔다리, 머리로 흐르게 한다. 순간, 드넓은 해방감과 기쁨이 다시 한 번 나를 통과하며 반짝인다. 

 

우선 처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호흡만 한다. 감각 속으로 침잠한다. 나의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주목한다. 코를 타고 들어오는 공기에 주의를 기울인다. 입 뒤쪽을 지나 목구멍을 따라 흘러 들어가 가슴을 팽창시키는 공기의 흐름을 느낀다.

 

318 들이쉰 숨이 심장으로 들어가 심장을 통과하여 몸 곳곳에 퍼지면서 그 사이 마주치는 것들을 감지한다. 감각과 욕망, 그에 대한 느낌과 그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감지한다. 늑골이 들려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을, 배가 부드럽게 열리며 긴장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낀다. 호흡에 집중할수록 호흡이 변하는 것에 주목한다. 그렇게 우리의 몸이 변한다. 내쉬는 호흡이 길어지며 끝없이 이어진다. 

 

 이마의 긴장이 풀리고 힘이 들어간 어깨가 내려가며 가슴이 열린다. 다리가 나른해지고 허리가 편안해지면서 공기의 흐름이 주변을 감싸고 돌아 우리를 관통한다. 

 

땅과 함께 호흡하기. 들이쉬고 내쉰다. 

 

숨을 다시 밖으로 내보내면서 감각의 인식을 활짝 열어 땋과 닿아있는 몸의 부위를, 아니면 적어도 땅과 나 사이에 놓인 의자나 침대 혹은 바닥과 닿아 있는 몸의 부위를 감지한다. 지금 어느 부분이 닿아있는가?

 

앉아 있다면 의자와 맞닿은 뼈가 의자를 내리누르는 느낌을 감각한다. 의자가 도로 밀어내는 느낌을 감각한다. 바닥에 닿아있거나 몸 아래 밀어넣은 다리를 느낀다. 

 

319 숨을 심장으로 불러들이고 내쉬면서 다시 한 번, 그 숨을 아래로 깊숙이 보낸다. 땅과 맞닿은 부분을 한꺼번에 느낀다. 그 부분들이 땅과 자신의 연결지점이라 상상하며 땅에게 의지하는 나의 모습을, 나를 지탱해지는 땅을 그려본다. 

 

땅이 나를 지탱해주며 밀어올리는 힘을 느낀다. 몸을 내맡긴다. 

 

땅은 우리를 아래로 끌어당김으로써 우리를 떠받든다. 계속 호흡한다. 스스로 지탱하기를 멈춘다. 살이 몸을 감싸안도록, 부드러운 천자락처럼 뼈를 느슨하게 휘감도록 한다. 

 

땅을 나의 내부에서 나의 힘으로 느낀다. 

 

320 공기와 함께 호흡하기 

숨을 들이쉰다. 들어오는 숨을 좇아 심장을 통과해간다. 심장을 열고 펼치고 확장한다. 하얀빛. 다시 호흡한다. 코를 타고 들어와 입으로, 목으로, 가슴으로 흐르는 공기를 느낀다. 

 

321 매번 숨을 내쉬고 난 뒤에는 자신과 땅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계속해서 땅에 나를 내맡긴다. 

 

 공기와 함께 호흡을 한다. 빛을 들이마신다. 나에게 곧장 불어닥쳐나와 비우고 가는 바람을 상상한다. 얼굴이 사라진다. 팔이, 몸통이, 다리가 사라진다. 남은 것은 발바닥, 땅을 내리누르고 빛을 떠올리는 발바닥뿐.

 

322 불과 함께 호흡하기. 

 호흡하고 있는가? 숨을 쫓아 심장으로, 심장을 통화개 땅과 맞닿아 있는 부위로, 공기로 녹아드는 피부 포면으로 흘러간다. 땅을 누르는 자신의 무게로, 공간과 하나 되는 나의 빛을 느낀다. 숨을 내쉬면서 몸 안의 모든 공기를 내뱉는다. 배의 저 밑바닥까지 모두 비운다. 한 번 더 공기를 밀어낸다. 숨쉬고픈 충동이 몸을 열 때까지 텅 비어 있는 채로 기다린다. 다시 한 번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쉰다. 이번에는 숨을 따라 더 멀리 몸 속 동굴까지, 골반이 감싸는 곳까지 내려간다. 그 한없이 공허의 순간에 횡격막을 내리누르고 골반 아래쪽 근육을 밀어올린다. 

 

323 다시 반복한다. 타오르는 불길을 느낀다. 그 생동감을, 내 안에서 되살아나는 생동감을 느낀다. 척추의 뿌리, 배의 요람에 생명 에너지의 근원이 있다. 그곳에서 생명의 고동이 점화된다. 이 불은 우리의 피부와 영혼을 덥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숨구멍을 통해 뻗어나가며 내뿜어진다. 

 

 복잡하게 짜인 감정조직을 인식하고 또 존중해주며 몸을 일으켜 앞으로 나아간다. 숨을 쉬면서 가슴을 조여오는 긴장감을 느낀다. 몸을 다잡고 계속해서 나아간다. 움직임이 움직임을 돕는다. 

 

 피로감이 몰려오면서 앉아 쉬고픈 마음이 차오른다. 무엇이 자신을 그리도 무겁게 짓누르는가. 지난주 누군가가 던진 한마디 때문이다. 다시 호흡에 집중한다. 깊이 숨을 쉬며 다시 뱃속에 불을 지핀다. 이 불에 생각을 태운다. 떠나보낸다. 계속한다. 마음은 여전히 정처 없이 떠돌고 팔다리는 여전히 욱신거린다. 하지만 이제는 중심이, 숨쉬는 배의 중심이 빛으로 타오른다. 내 안에서 그 빛의 고동을 느끼며 산을 올라간다. 되살아난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던 마음도 몸의 움직임으로 자연스레 되돌아온다. 

 

324 호흡으로 지펴 몸 안에서 타올라 되살아난 불은 필요 없는 물질을 태워 없앤다. 

 

 우리는 에너지를 소모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기도 한다. 자신 안에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을 펼쳐놓ㅇ면서 우리는 자유를 발견한다. 

 

 다시 숨을 쉰다. 이번에는 어떤 근육도 수축시키지 않은 채 근육의 감각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아랫배의 힘과 길이를, 넓이와 폭과 깊이를 느낀다. 뱃속에 뿌리내린 불의 핵을, 몸 안에 퍼진 공기에 차오르는 온기를 느낀다. 숨을 쉬며, 내가 욕망 안에서 이 생기로운 불을 찾아낼 수 있는 다른 사람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다. 

 

325 물과 함께 호흡하기 

 우리는 땅이고 공기고 불이며 또 물이다. 

 

무엇을 하고 있든 어떤 순간에든 물은 흐른다. 앉아서 책을 읽는 순간에도 쳑추는 펴지고 눈은 뜨이며 의식은 명료해진다. 자신이 신체의 창조거인 생동감을 흘려보내는 열린 수도관이 되었다고 감각하게 될 것이다. 

 

326 호흡 순환법 실천하기 

 처음에는 고요한 가운데에서 호흡 순환법을 연습하는 것이 좋다. 조용한 장소에 혼자 있을 때 시도해본다.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웁는다. 몸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느껴질 때까지 땅, 공기, 불, 물과 번갈아가며 호흡한다. 

 

심장을 통과해 숨을 들이쉰 뒤, 내쉬는 동안에 둘을 세며 땅과 맞닿은 신체부위에 집중하고, 둘을 세며 공기를 느끼고, 둘을 세며 뱃속의 불씨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마지막으로 둘을 세며 몸 안에 흐르는 체액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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