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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김애란) : 감정이 터지지도, 눈물을 뚝뚝 흘리지도 못하게 한다. 그런데 마음이 아릿하고, 눈에 눈물이 고인다.

by 당편 2022. 10. 7.

 

곱창을 씹듯 한 문장을 여러 번 읽고 집중하게 된다. 작가의 말 중 '무언가 나를 지나갔는데 그게 뭔지 몰라서 이름을 짓는다. 여러 개의 문장을 길게 이어서 누구도 한 번에 부를 수 없는 이름을. 기어코 다 부르고 난 뒤에도 여전히 알 수 없어 한 번 더 불러보게 만드는 그런 이름을. 나는 그게 소설의 구실 중 하나였으면 좋겠다'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사람의 책을 읽을 수 있어서...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 은행 몇 알이 용대의 택시를 굽어보는 것 같이 느껴진다. 울수도 없지만, 울지 않을 수도 없는 묘사와 이야기에 심장을 저당잡힌 것 같았다. 그걸 누군가 꽉 쥐고 있어서 답답하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기분이다. 

 

하루의 축

 - '추석이 내일이었다.' 로 끝이 난다. 내년 추석에 기옥 씨가 생각날까? '엄마, 사식 좀' 다섯글자가 뭔데 해물전 찢듯 사람 맘을 조각내는 거냐고. 화장실에 가면 기옥 씨가 연상된다.

 

서른

 - 혜미의 문자를 보자마자 입으로 울음이 새어나왔다. 그래서 입을 막고, 숨을 참았다. 길가다 똥 밟는 것보다 쉽게 사람이 불행해지는 것 같아서, 계단을 내려가다 헛딛였을 뿐인데 갑자기 벼랑 아래로 추락하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그럴 것 같아서 눈물이 났다. 내 곁에 있는 불행한 사람이 생각났고, 내 본심을 깨달아서 더욱 울었다. 

 

큐티클

 - 을씨년스러운 이야기로 전개될 까봐 긴장하고 있었다. 흰 머그잔 안에서 식어서, 차갑게 남겨진 쌉쌀한 커피를 마신 듯 하다. 그래도 다행이란 안도감이 들었다. 

 

호텔 니약 따 

 - 하노이 공항에 앉아서 맥없이 먼 곳만 바라보는 은지와 부루퉁한 얼굴로 천장을 응시하는 서윤은 어떻게 됐을까?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이어, 명화가 한국말로 말했다. 

"당신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용대도 그 말을 따라 했다.

"당신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테이프는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명화가 한마디 하면 용대가 한마디 하고. 용대가 서투르게 몇 문장 외면 명화가 똑같이 답해주는 식이었다. 

 

그렇게 그 여자 나라말을 외면서,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어쩌면 앞으로도 영영 못 가볼 나라의 말을 하면서, 자신이 차츰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개개의 사연과 얘기, 그리고 노래를 실은 도시의 나비 떼가.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

...

"여기서 멉니까?"

 

겨울밤.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약속처럼, 나뭇가지에 끝끝내 매달려 있는 은행 몇 알이 방금 막 지나간 택시를 굽어보며, 떨어지지도 썩지도 못한 채 몸을 떨고 있다. 


하루의 축

 

밥통 불빛은 사람이 공복 시 자신의 식욕으로부터 느끼는 거리와 비슷한 자리에서, 가까운 듯 멀고 또렷한 양 어슴푸레 빛났다. 

#거리 : 둘 사이가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정도 #자리 : 물체가 차지하고 있는, 일정한 넓이의 공간이나 장소 

#또렷하다 : 분명하고 확실하다 #어슴푸레 : 뚜렷하게 잘 보이지 않고 흐릿한 모양


 그걸 뭐라 부르든 오십대 중반의 여자가 감당하기 쉬운 증상은 아니었다. 


터미널은 이들이 발산하는 엷은 흥분, 피로, 수다로 왕왕거렸다. 

#왕왕거리다 : 귀청을 울릴 정도로 몹시 큰 소리를 자꾸 내다


용역 업체의 오토바이가 한겨울 사냥 나온 개처럼 가쁜 입김을 내뿜으며 가르랑거리는 소리였다.


 

곧이어 음식물 종량제 쓰레기봉투에서 새어 나온 구정물 냄새가 청량한 새벽 공기를 타고 기옥 씨네 집까지 들어왔다. 간밤, 잠을 설친 도시가 찌뿌둥한 얼굴로 기지개를 켜며 내는 구취였다.


20년 넘은 보일러는 따로 독립된 공간이 아닌 부엌 한쪽에 설치미술처럼 걸려 있었다. 그게 거기 있음 안 되는데. 그게 거기 있음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동정하고 나무라는 식으로, 난해하게.


이름을 알 수 없는 이국의 꽃들이 무더기로 그려진 브라였다. 기옥 씨는 변기에 팔꿈치와 허벅지가 닿지 않도록 주의하며 세탁기 옆 공간에 쭈그려 앉았다.

#시장 가판에 늘어진 브라가 떠오른다. 그리고 기옥 씨의 생활과 공간의 크기를 눈앞에서 그려진다. 


도시의 한산했던 도로 위론 어느새 피가 돌듯 차가 회전했고...... 기옥 씨네 골목 어귀에서도 새벽의 귓볼을 퉁기고 가는 자전거 벨 소리가 들려왔다. 추석이 내일이었다.

#새벽의 귓볼을 퉁긴다는 표현 뭐야. 자전거 벨 소리가 들리고, 내 귓볼이 만져진 듯하다.


그 무탈함이 주는 이상한 압도, 안심, 혹은 아름다운 같은 것이 공항에는 있었다. 사람들은 그걸 길게 뻗은 고속철도나 우아한 현수교, 송전탑에서도 느꼈다


정차된 항공기들은 모두 앞바퀴에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그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몇몇 항공기는 탑승동 그늘에 얌전히 머리를 디민 채 졸거나 사색 중이었다.


인천국제공항은 내장이 훤히 비치는 물고기처럼 유려한 곡선과 과감한 직선을 바탕으로 세련되게 설계돼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공간에서 바로 그 '드나듦의 흔적'을 없애는 것. 이것이 공항 청소의 핵심이었다.


기옥 씨는 음식으로 자기 몸에 절하고 싶었다. 한 계절, 또 건너왔다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시간에게, 자연에게, 삶에게 '내가 네 이름을 알고 있으니, 너도 나랑 사이좋게 지내보자' 제안하듯 말이다.


한우와 오래 저울질 하다 고른 값싼 미국산 쇠고기였다.


일부러 새로 한 밥은 정작 한 술도 못 뜨고였다.


기옥 씨는 구찌가 구찌인 걸 몰라 가짜가 가짜인 줄 몰랐다.


반가움인지 불안함인지 모를 감정에 뛰는 내내 가슴이 쿵쿵거렸다. 

#뛰는 내내 가슴이 쿵쿵. 캬 그냥 좋다


가슴에 외풍이 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의 눈빛과 표정이 그들의 언어를 번역해주고 있어서였다.


기옥 씨는 그게 '마카롱'이라 불린단 사실은 몰랐지만, 자기 손에 들린 과자가 거의 새 거나 다름없이 꽉 차 있다는 건 알았다. 이윽고 애 엄마가 말간 얼굴로 기옥 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놓고 건 거 아니에요."

#문장이 뻑뻑한 눈을 촉촉하게 했다. 그 이유를 즉시 알 수 있었다. 말간 얼굴과 놓고 간 게 아니라는 말. 당신이 떠올랐다. 


아울러 그녀는 한국에 '돈 벌러 온 사람'과 '돈 쓰러 온 사람'을 구분할 줄 알았다. 타국에 일하러 온 사람들의 표정과 자세 그리고 눈빛은 어딘가 좀 달랐다. 그들이 그걸 드러내길 원하지 않는다 해도. 마치 누군가 지하철 안에서 기옥 씨의 얼굴을 보고 그녀의 '생활'을 판단하고 있는 것처럼. 밑이 짧은 바지를 입고 쪼그려 앉았을 때 함부로 드러나는 엉덩이 골처럼, 옆구리 살처럼, 이상하게 그런 건 기어코 표가 나고 마는 것처럼 말이다.

#함부로 드러나고, 기어코 표가 나고 마는 것


번번이 이해하려 해도 결국에는 납득이 안 되는 그것. '사람들은 왜 이렇게 뭘 흘릴까.'


기옥 씨는 무릎 위에 손가방을 올려놓고 구겨진 전단지 사이에서 흰색 봉투를 찾아냈다.


그러고는 어찌 이리 쉬운가. 어째서 이렇게 한 가족의 단란이 시시하게 망가지는가 이해할 수 없었다.


기옥 씨는 자신의 구찌 가방을 뒤져 고급스런 종이 상자를 꺼냈다. 그러고는 먹기 너무 아까울 정도로 예쁜 색색의 파스텔 톤 마카롱을 바라보았다.


기옥 씨는 왠지 울 것 같은 얼굴로 나지막하게 웅얼거렸다. '왜 이렇게 단가...... 이렇게 달콤해도 되는 건가......'

바람이 불자 기옥 씨의 브래지어 위에 핀 가짜 꽃들이, 이름을 알 수 없는 이국의 열대 식물이 휘청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마음이 이렇게 문장으로 쓰여질 수 있구나. 그 문장을 연상된 무언가가 내 마음을 스산하게 하고 휘청거리게 하는구나.


마치 많은 이들이 재떨이와 재떨이 청소부를, 승강기와 승강기 청소부를 동격으로 대하듯 말이다.


이윽고 기옥 씨는 힘을 내, 마치 좋아하는 남자에게 고백이라도 하듯, 설렘인지 수치심인지 모를 감정에 바르르 몸을 떨며 말했다. " 그 일...... 제가 하면 안 될까요?"


기옥 씨는 그저 자신이 윗사람에게 의견을 묻고 있는 중이라 생각했지만. 파트장의 눈에, 이 광경은 가운데 머리가 통째로 없어 마치 암 환자처럼 보이는 여자가 다짜고짜 자기를 찾아와 야근을 해도 되느냐고 묻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당신의 시각은 이렇게 다르구나. 어후 내키는대로 해야지. 


심드렁한 얼굴로 아이패드를 들여다보던 초등학생은 학교에서 숙제로 내준 '옷은 시집올 때처럼, 음식은 한가위처럼'이란 속담의 뜻을 막 '터치'하고 있었고......

#기옥 씨의 바람막이와 모자, 그녀가 해놓고 먹지 못한 밥이 연상될까. 속담의 뜻은 '잘 입고 잘 먹고 싶다는 말.'


서른

 

하루 일을 마치고 고단하게 잠든 서울의 얼굴 같기도 하고요.


아무튼 오늘도 멀리 캄캄한 도시 위엔 붉고 노랗고 희고 푸른 불빛들이 알사탕처럼 뿌려져 있어요. 깨물어 먹고 싶을 만큼, 예쁜 서울이에요, 여기.


바람이 세월을 거워가듯 세월이 언니로부터 앗아간 것들이 있을 테죠?


8년. 8년이라니. 괄호 속에 갇힌 물음표처럼 칸에 갇혀 조금씩 시들어갔을 언니의 스물넷, 스물다섯, 스물여섯......서른 하나가 가늠이 안 됐거든요.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 마음속에 생기는 기대와 암시, 긴장과 비관에 대해서라면 저도 꽤 아는데. 자식 노릇, 애인 노릇 등 온갖 '도리'들을 미뤄오다 잃게 된 관계들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닌데. 좁고 캄캄한 칸에서 오답 속에 고개를 묻은 채, 혼자 나이 먹어갔을 언니의 청춘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어요.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요.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데. 다른 친구들은 무언가 됐거나 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저 혼자만 이도 저도 아닌 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져요. 아니, 어쩌면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고요.


외국어를 몸 안에 지니고 다니면 칼을 찬 듯 어디서든 든든할 것 같았거든요.


왜 물이 한가득 든 투명한 키버 안에 스포이트로 잉크를 한 방울 떨어뜨리면 순식간에 아름다운 뭉게구름이 생기며 액체의 성질이 바뀌게 되잖아요? 그때 제 마음이 그랬던 것 같아요. 사람들의 작은 배려나 선의 하나에 쉽게 흔들리고 감동하고 저 역시 가능하면 조그마한 답례라도 하고 싶어졌으니까요.


'너는 자라 내게 되겠지......겨우 내가 되겠지'

#비행운을 떠올리면 이게 제일 먼저 생각난다.


어느날 눈뜨고 보니 제가 다른 사람이 돼 있더라고요.


그리고 그때 저를 위로해준 건, 제가 직접 손을 뻗어 만질 수 있는 누군가의 체온이었어요. 욕망이나 쾌락은 그다음 문제였지요. 어쩌면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온기는 그리 많은 양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이만하면, 이 정도면 충분하다면서요.


맞아요, 언니. 그런데 그 빤한 게 사람 맘을 막 쥐고 흔들데요?


그리고 실은 제가 아주 오래전부터 그런 말을 간절히 듣고 싶어 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어요. 말 그대로 '교과서에 나오는 말' 같은 거. 올바르고 아름다운데, 실은 아무도 믿지 않는 말들 말이에요.


저는 제 이성과 의지와 논리를 믿었어요. 그리고 전 남자친구 말마따나 들어보고 아니다 싶음 그 자리서 그냥 나오면 되는 줄 알았고요. 남자친구는 제가 설득에 넘어가지 않자 결국 이런 말을 했어요. 들어보고 정말 나쁜 곳이다 싶음, 여기가 그렇게 안 좋은 데라면, 네가 나를 구해줘야 하지 않겠냐고.


담당자는 절 안심시키려는 듯 사업자등록증을 보여주고 이 회사가 병역 특례까지 되는 곳이라고 덧붙였어요.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단 생각이 들었지만 인정할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거기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을 그냥 저도 따르고 싶었거든요.


매달리는 느낌을 줘선 안 된다, 조급해해서도 머뭇거려서도 안 된다


어쩌면 저 스스로 머릿속에 스위치 하나를 꺼놨던 건지도 모르고요.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건 회사가 가장 잘하는 일 중에 하나였거든요.


혜미는 저와 눈이 마주치자 상큼하고 건방지게 씩 웃었어요. 

...

그런데 뇌에 무리가 가서 지금은 식물인간이 된 채 병실에 계속 누워 있다고 말이에요. 

#입꼬리가 광대에서 턱까지 떨어지는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눈물이 흐르진 않는데 고인다.


그래서 이렇게 제 손바닥 위에 놓인 오래된 물음표 하나만 응시하고 있어요. 정말 중요한 '돈'과 역시 중요한 '시간'을 헤아리며, 초조해질 때마다, 한 손으로 짚어왔고, 지금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그것.

'어찌해야 하나'

그러면 저항하듯 제 속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요.

'내가, 무얼, 더'


마흔의, 환갑의 나는 어떤 얼굴로 살아가게 될지, 어떤 말을 붙잡고 어떤 믿음을 감당하며 살지 모르겠어요. 바뀌는 건 상황이 아니라 사람일까요.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바꿀 수 없게 만드는 건 무엇일까요?


아직도 그 애가 보낸 메시지가 저장돼 있어요. '샘 여기 분위기 쩔어요.. 원래 이런 건가염. ...


큐티클

 

죽은 듯 엎드려 있다 날바닥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덩치 큰 여행 가방과 나는 초면인 양 서로 겸연쩍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그럴듯해' 보이고 싶었다.


마치 세상 모든 식물들이 '나는 살아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갈 거예요!'라고 외치며 사방에 전단지를 뿌리는 듯했다.


상품 사이를 산책할 때 나는 엄격한 동시에 부드러운 사람이 됐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다는 데서 오는 여유. 그러나 원하지 않는 것 역시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식의 까다로움.


좋은 옷을 입는 건 그것의 가격이나 옷감뿐 아니라 좋은 실루엣을 소유하는 것과 같다는 걸 깨달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책가방에 점수가 잘 나온 성적표를 담아 집으로 뛰어가는 아이처럼 나는 히죽 웃었다.


이건 오래 쓸 거니까, 이건 자주 사용하는 거니까,라는 식의 근거로 분수에 맞지 않는 물건을 골라 담았다. '아주 조금 나은' 물건에 대한 욕구.


그런데 이상한 건 그 많은 물건 중 내게 '딱 맞는 한 뼘'은 없었다는 거다. 모든 건 늘 반 뼘 모자라거나 한 뼘 초과됐다.


어수룩한 도둑처럼 근처 기둥에 몸을 숨긴 채 동정을 살폈다.


교육받은 사람답게, 당신을 존중한다는, 나는 으스대는 사람이 아니라는 식의 태도.


일단 뭔가를 알게 되자 그 앎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요 며칠 나는 다른 이들의 손톱을 표 안나게 흘깃거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더 이상 손톱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손톱에 '사로잡혀' 있었다. 

#생각하다 : 머릿속에 떠올리다. 사로잡히다 : 마음이나 정신을 온통 빼앗겨 이끌리다


더구나 태국이라니. 모두가 한두 번은 해외 여행을 다녀오는 판에 어디 가서 명함을 내밀 만한 추억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손톱마다 알알이 박힌 깨끗하고 균등한 크기의 반달은 또 얼마나 예쁘던지. 그녀의 손은 스스로 과시하고 있지 않아 더욱 과시적으로 보였다.


그 손에 자꾸 눈이 간 건 그것이 무척 '깨끗해' 보인다는 데 있었다.


누군가 나를 오랫동안 정성스럽게 만져주고 꾸며주고 아껴주자 나는 아주 조그마해지는 것 같았고, 그렇게 안락한 세계에서 바싹 오그라든 채 잠들고 싶어졌다.


어쩌면 몸이야말로 가장 비싼 액세서리일지도 몰랐다.


나는 책가방에 좋은 성적표와 함께 상장까지 얹어 가게 된 아이처럼 연신 비실비실 웃었다.


나중에는 여행 가방이고 부케고 어디 갖다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오래 여행 가방 옆에 있자니 어쩐지 우리가 떠나온 사람 떠나갈 사람이 아니라 멀리 쫓겨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꽤 오래전부터 그렇게 커다란 가방을 이고 다녀던 것 같은 기분도.

 


호텔 니약 따 

 

헤드라이트를 켜고 야간 운전을 하는 사람처럼, 불빛이 닿지 않는 시야 밖 상황이나 관계를 종종 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하는. 그리고 그게 주위 사람들을 가끔 얼마나 서운하게 만드는지 모르는 녀석이었다.


달콤한 과육으로 싸여 있지만 단단한 자기 씨를 갖고 있는 아이라고 할까.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되고,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두려움을 깔보는 거라고. 실은 본인도 믿지 않는 주문은 외워가며 말이다.


공항 안의 쾌적한 공기가 살갗에 닿자 화폐 감각이 무뎌지며 배짱이 생겼다.


얼핏 보면 별거 아닌 문제들이지만, 그런 것이 차곡차곡 쌓이자 어느새 두꺼운 벽이 되었다.


서윤도 '이번에는 네가 들어'라고 하면 될 것을, '언제까지 그러나 보자'라는 식으로 꽁하게 버텼다. 한편 은지는 서윤이 유적지에서 내뱉는 감상들이 다소 피곤하게 느껴지는 참이었다.


은지는 정말 악의 없이 던진 거였는데 그 말은 서윤에게 커다란 상처가 됐다.


말하자니 쩨쩨하고, 숨기자니 옹졸해지는 무엇. 그 속에서 13세기 크메르 양식의 절정이나 오래된 나무의 아름다움, 혹은 앙코르 여신의 젖가슴을 지나 이제 막 그들의 뺨에 닿는 바람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은지는 서윤이 혹 노트네 자기 욕을 쓰고 있는 건 아닌지 신경 쓰였다. 본인도 상대에 대한 불만이 한가득했던 터라 그런 의심이 들었다.


"힘든 건 불행이 아니라... ... 행복을 기다리는 게 지겨운 거였어."


서윤이 그토록 서럽게 우는 건 할머니가 죽어서도 박스를 줍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자 서윤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고함치기 시작했다. "네 캐리어! 니 꺼니까 니가 들라고!!"


은지가 울먹이며 쉬지 않고 쏘아댔다. "그래서? 그렇게 착해서 썸낭이 꼬치구이 줬을 때 슬쩍 버렸니? 더러워서 겁났어? 너는 몰래 치웠다고 생각할 테지만 다 봤다고. 그때 썸낭 표정이 어땠는지 알아? 그래도 난 다 먹었다고. 다 먹었다고 이 나쁜 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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