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피그말리온 아이들(구병모)

by 당편 2022. 1. 2.

71쪽 :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틈 없이 아이를 먹여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하루에 세 시간씩 자며 낮에는 햄버거 패티를 굽고 밤에는 검정고시 준비까지 해낸 기특한 사례로, 주위의 따뜻한 이웃들이 품앗이로 아기를 돌봐 주면서 그녀의 합격에 기여를 했다는 스토리였다. 그녀의 앞날은 창창해 보였지만실은 그 끝에 기다리는 거라곤 언제 잘릴지 모르는 비정규직 노동일 가능성이 크리라. 

 그녀의 몇 년의 과거가 문장 한 줄로 압축되었다. 그리고 누구도 알 수 없는 그녀의 미래는 가능성이 높단 이유로 언제 잘릴리 모르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상정되어 문장 한 줄로 정리되었다. 

 저 문장에 마음이 삐걱거렸다. 막힘없이 읽히는 책이라, 메모 없이 보고 있었는데 다급하게 메모지에 'p71 그녀의 앞날은~' 적었다.  왜 저 문장이 불편했을까 이유를 숙고했다. 숙고의 결과는 이렇다. 첫째 나의 처지가 그녀와 같지 않지만 비슷하게 불우하기 때문이었다. 둘째 내 미래 외부 상황에 의해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셋째, 삶이 저렇게 단순하고 노골적으로 정리될 수 있구나 놀랐다. 나 역시 누군가를 저리 평가한 적이 있었기에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당황했으며, 넷째는 누군가는 내 삶을 저렇게 평가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불확실한 미래때문에 불안하고 고민스러운 내 미래 역시 저렇게 말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95쪽 : 말씨에 품위가 깃들고 쇼윈도가 있는 자기 가게를 가진 것만으로도, 거리에서 꽃을 팔던 때보다 신분이 월등히 상승했다고 할 수 있을까. 또는 그런 눈에 보이는 실적으로 자아가 최상의 성취감을 누릴 수 있을까. "

 

99쪽 : 누구나 열리기 원치 않는 상자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눈에 보이는 형태를 가진 게 아니더라도.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원치 않는 이유가, 반드시 상자 안에 내용물이 소중하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간직'과는 느낌이 다른 보존이다. 또한 타인이 강제로 개봉하는 행위만을 꺼리는 게 아니라 실은 자기 자신이 가장 열고 싶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