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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승우)

by 당편 2022. 2. 13.

 '이승우' 이름으로 선택한 책이었다. 이승우 작가를 좋아한다. 그의 책을 다 읽었다거나 수차례 읽은 건 아니지만 그의 이름을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좋아한다.

 

 어린 시절 장래희망 중 하나는 소설가였다. 물론 어린 시절의 미래인, 현재는 출근시간 지하철에 깔린 '직장인1'이다. 꼭 이야기를 생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독자나 말을 재밌게 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유용할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문장 하나, 단어 하나, 문장부호까지 집중해서 읽으라는 말도 또한 재미는 긴장라고 간단하게 정리해준 것도 이 책이 처음이었다. 

 

 책 크기는 작고, 두께는 아이폰13 미니정도여서 화장실에 폰 대신 이 책을 끼고 갈 정도로 좋았다. 가져만 가고, 읽지 않았다는 게 웃긴 지점이다. 

 

 작년에 글쓰기 모임에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글을 쓰면서 내 글이 별로라는 느낌을 계속 안고 있었다. 그 감정의 이유를 이

책이 알려주었다. 쓰고자 하는 내용을 압축하고 비약하여 덩어리만 썼기 때문이었다. 소설은 아니지만 글은 완성품이 아니라 그걸 만드는 과정, 모습을 쓰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매년 한번은 읽어야겠단 마음을 먹게 한다. 또한 이승우 작가의 책들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매월 한권씩 지정하여 되새김질해야지 하는 다짐을 한다.  

 

소설은 김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배추 뽑는 손, 고춧가루 범벅이 된 손을 보여주는 것이다. 

 

32쪽 읽은 사람만이 쓴다. 잘 읽은 사람이 잘 쓴다.
33쪽 소설 문장들은 독자인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나는 대들거나 반문하거나 수용한다. 나의 대듦이나 반문이나 수용이 이어지고, 이런 일들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면서 거기에 하나의 유연하고 둥글고 탄력 있는 공간이 생긴다. 
35쪽 꼼꼼하게 천천히, 문장 하나, 단어 하나, 심지어 문장부호 하나에 집중하는 책 읽기. 단어와 문장, 심지어 문자부호 하나하나의 쓰임새를 음미하는 책 읽기. 소설 쓰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40쪽 할 말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아무 말이나 허용된다는 건 아니다. 그 말은 들을 만한 말이어야 한다. 
41쪽 절실한 것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의 한 처소는 기억이다. 
42쪽 또한 그 절실한 것을 구체적으로 말해야 한다. 소설은 영혼이 아니라 육체다. 
58쪽 우선 인정해야 할 진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하나도 빼놓지 않고, 조금도 다르지 않게 옮겨 적는 일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59쪽 '바람이 불자 초록색 나뭇잎들이 흔들렸다.' 이 문장은 얼마나 어수룩한가. 떡갈나무 잎과 오동나무 잎과 감나무 잎의 초록색이 같지 않고, 같은 감나무에 달린 이파리들도 색깔이 꼭 같지 않다. 크기도 제각각이고 모양도 제각각이다. 크기와 모양과 색깔에 따라 흔들리는 모양도 제각각일 것이다. 만일 한 나무에 나뭇잎이 1000개의 나뭇잎의 모양과 크기와 색깔이 다르고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다 다 다를 것이다. 
61쪽 무엇이 보이느냐(무엇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보느냐(무엇에 의미를 부여하느냐)가 중요한 것은 그것만이 글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64쪽 다 쓰려고 하지 말고 필요한 것만 써야 한다.
83쪽 질문들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왜? 어떻게? 한 질문에 대답하고 나면 다른 질문이 기다렸다는 듯 곧장 튀어나온다. 튀어나오는 질문들을 소홀하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 질문이 멈추는 순간 대답이 멈추고, 대답이 멈추는 순간 소설도 멈추기 때문이다. 귀찮더라도, 힘들더라도 대답해주어야 한다. 
87쪽 문제는 이것들 가운데 어떤 걸 선택하고 어떻게 순서를 만들어 연결 지을 것인가에 있다. 요컨대 플롯이다. 플롯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긴장감이다. 

재미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88쪽 긴장할 때 우리는 재미를 느낀다. 
긴장이 없으면 재미가 없고, 재미가 없으면 읽거나 보지 않는다. 
90쪽 긴장은 구체의 영역에서 태어난다. 추상적인 것들은 긴장으로부터 멀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어렵다. 그래서 우리의 아이들은 돈 주세요, 하지 않고 책값 주세요, 한다. 아니, 그것도 덜 구체적이다. 좀 더 구체적이려면 참고서와 시집을 사야하는 데 돈이 필요해요, 하고 말해야 한다. 
전쟁과 평화라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구호 대신, 전쟁 때문에 부모를 읽고 자기 팔도 하나 잃은, 살가죽밖에 남지 않은 검은 얼굴의 소년이 진흙탕 속에서 빵을 건져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편을 택해야 한다는 뜻이다.
94쪽 내가 생각하기에 소설 쓰기는 '기르기'보다 '만들기'쪽이다. '저절로 되는'것이 아니라 '일부러 하는' 것이다. 자연이 아니라 인공이다. 
96쪽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취하기보다 버리기가 더 어렵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일수록 그렇다. 
그럴듯하지 않은 참이 아니라 그럴듯한 거짓이어야 한다. 그럴듯하지 않은 참은 소설의 흐름에 어울리지 않거나 소설의 흐름을 방해한다. 
98쪽 가령 '입'은 강의실·마이크와 배치될 때 '말하는 기계'가 되고, 식당·음식과 배치될 때 '먹는 기계'가 되며, 침실·연인과 배치될 때 '섹스하는 기계'가 된다. 우리가 선택한 재료를 무엇에 연결하고 어디에 배치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사뭇 달라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101쪽 통일성과 연결성이 여기서는 중요하다. 하나의 재료(사건, 인물, 일화, 이미지, 상징, 진술 등)를 배치할 때 그것이 전체 소설을 이루는 데 적절하게 기여하는지(통일감), 다른 재료들(사건, 인물 일화, 이미지, 상징, 진술 등)과 긴밀하게 잘 어울리는지(연결성) 살펴야 한다. 같은 재료를 주고 소설을 쓰라고 할 때 모든 사람이 같은 소설을 쓸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배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소설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소설가는 전략가여야 한다. 
104쪽 가공의 과정에서 간과하면 안 되는 원칙은 유기적 연결이다. 이야기들은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고, 삽화들은 인과관계에 따라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우리의 육체가 그런 것처럼 소설의 육체 또한 그래야 한다. 아니, 소설이 하나의 육체다.
강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강은 지금 당신의 주인곳이 있는 곳도 아니고 당신의 주인공이 가야할 곳도 아니기 때문이다. 
105쪽 과정은 과감하게 생략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 자기가 하려고 하는 중요한 이야기에 비해 시시하고 하찮은 것이기 때무니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그 중요한 이야기를 빨리하는 것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더러는 그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라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무시되거나 생략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틀린 생각이다. 강을 거치지 않고 숲에서 곧장 성 안으로 들어가는 격이 아닌가. 
107쪽 가자마자 사건을 목격했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차를 마시다가 그랬을 수도 있다. 물론 그런 건 당신이 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당신은 훨씬 중요하고 훌륭한 그 특별한 사건을 이야기해야 하고, 그것에 비교할 때 그런 것 따위-뭘 하러 갔느냐, 누구랑 갔느냐, 가서 뭘 하고 잇었으냐-'는 시시하고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시하고 하찮지만, 말하자면 그것이 바로 강이다. 
108쪽 발이 젖고 머리가 젖고 입 속으로 물이 들어갈 때 비로소 강을 건넜다고 할 수 있다. 
109쪽 삶이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한 것처럼 소설 쓰기 또한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하다. 손에 흙을 묻혀가며 배추를 뽑고 손에 고춧가루를 묻혀가며 김치를 담근다. 배추를 밥상에 올리기 위해서는 먼저 흙을 손에 묻혀가며 배추를 뽑고 고춧가루를 묻혀가며 김치를 담가야 한다. 소설은 김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배추 뽑는 손, 고춧가루 범벅이 된 손을 보여주는 것이다. 압축과 비약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야아 한다. 우리의 삶은 압축되지 않고, 될 수 없고, 비약할 수도 없다. 강물 속으로 몸을 밀어 넣어야 한다. 
121쪽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해 '말하는' 사람에 의해 '말해진' 사실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사실에 대한 누군가의 언급이다. 
사건의 본질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해석이 존재하는 것이다. 
122쪽 말하는 사람의 욕망과 의도와 입장에 의해 해석되고 재구성되지 않는 사건이란 없다. 
123쪽 어떤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사건과 함께 그 사건을 옮기는 사람의 욕망과 의도도 함께 듣는 셈이다. 이것이 소설이다.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지만,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 말해진 이야기다. 
135쪽 그레고르 잠자의 경우와는 달리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그녀의 환상을 감안하고, 실제로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지, 그녀에 의해 서술된 문장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읽어야 한다. 
139쪽 소설은 종잡을 수 없는, 이것이면서 저것인, 그러나 이것만도 아니고 저것만도 아닌 무정형의 세계를 비춘다. 그러나 세계가 그렇다고 해서 소설 속에 비추인 세계마저 종잡을 길 없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을 통해 반사되는 순간 세계는 일정한 형태를 얻는다(얻어야 한다). 무정형의 세계에 형태를 부여하는 작업이 소설 쓰기인 까닭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거울의 반사면이다. 거울은 감정도 욕망도 생각도 없는 죽은 물체가 아니다. 거울은 세계를 비추되 자신의 가정과 욕망과 생각에 따라 질서를 부여하고 형태를 부여해서 비춘다. 거울을 통과해 나온 세계는 거울의 반사면(의 감정과 욕망과 생각)에 의해 정리되고 해석되고 재구성된 세계다. 어떤 거울은 예쁘게 비추고 어떤 거울은 날씬하게 비춘다. 거울이 다 같은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141쪽 예컨대 소설 독자들은 현실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작가의 해석을 읽고 싶은 것이다. 작가의 해석을 통해 재구성된 현실을 만나고 싶은 것이다. 작가인 거울. 작가의 욕망이며 세계관인 거울의 반사면. 
145쪽 기차 화장실에서의 변비 해결이라는 에피소드는 주인공의 비참하고 갑갑한 현실을 훨씬 더 잘 이해가 할 뿐 아니라 현실의 다른 층을 보여줌으로써 소설의 품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 
146쪽 소설은 대체로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어쩐지 허전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어쨌단 말이야? 하는 질문과 맞닥뜨리지 않겠는가. 그런 소설은 비유하자면 지표수의 물로 만든 맥주와 같다. 만일 그들의 사랑이 현실(지상)에서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한 주인공들의 지하(비현실)에 대한 꿈꾸기나 신화 속의 대한 동일시의 과정을 보여준다면 소설은 달라질 것이다. 층이 생기니까. 그 내부의 깊은 층에서 끌어올려진 메타포나 상징은 지표면의 그렇고 그런 사연들에 다른 빛을 비춘다
149쪽 현실 속에서는 몰라도 소설 속에서는 어떤 시시한 사건도 '그냥' 일어나는 법이 없다. 
150쪽 인물을 움직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극을 주어야 한다. 자극에 대한 반응이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인물이 움직여야 사건이 일어나고 이야기가 전개된다. 
151쪽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우리의 주인공은 고민에 빠진다. 고민의 내용은 고향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다. 그런데 그는 왜 고민을 하는가. 가야 하는데 가지 못할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갈 수 없는 사정이 가야 한다는 당위와 싸운다. 싸움은 치열할수록 좋다. 
153쪽 시간이 만드는 소설(이야기가 중요한 소설)에서는 소파는 단순히 사람이 앉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또 그래도 상관없다. 그러나 공간이 역할을 하고 묘사한 중요한 소설에서는 소파가 그저 단순한 도구일 수 없다. 도구 이상이다. 그것은 낡은 소파, 붉은 소파, 우단 소파 등의 배치를 통해 고유한 상징성을 확보하게 된다. 권태를 나타내기도 하고, 기다림을 표시하기도 하고, 열정을 표현하기도 하고, 폐기 처분 직전의 처지를 상징하기도 할 것이다. 
 안개도 비도 그냥 내리지 않는다. 현실 속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소설 속에서는 내릴 만할 때 내리고 표현할 미지가 분명할 때 내린다. 그것들이 만드는 분위기와 이미지가 소설의 몸을 이룬다. 때때로 공간이 곧 캐릭터라고 말해지는 것은 이런 경우다. 
155쪽 표현하려고 하는 관념이 훌륭하고 형상이 근사하다고 해서 좋은 조각품이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이 중요하지만 그것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떤 고상한 생각이나 어떤 근사한 이야기가 좋은 소설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잘 표현되어야 한다. 
156쪽 소설이 되었느냐 되지 않았느냐를 가늠하는 첫번째 기준이 문장이고, 소설의 격과 차원을 운위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마지막 기준도 문장이다. 소설을 쓸 때 우리가 이용하는 문장의 양식은 대체로 서사와 묘사다. 
서사는 '무슨 일이 있어났는가'를 밝히는 글이다. 묘사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글이다. 서사는 시간의 흐름을 기술하고 묘사는 공간의 양상을 기술한다. 서가는 시간적인 글쓰기이고 묘사는 공간적인 글쓰기다. 서사는 움직임이나 행동에 대해 말해주고(그러니까 시간이 흐르고) 묘사는 모양이나 양상에 대해 그림을 그려 보여준다(그러니까 공간에 놓인다). 서사는 '무엇무엇을 했다'의 표현이고 묘사는 '어떠어떠하다'의 표현이다. 서사는 동사를 필요로 하고 묘사는 형용사를 필요로 한다. 
158쪽 장식적인 문장, 표현의 효과를 의식한 문장은 정확한 문장을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 추구해야 할 다음 조건이다. 정확한 문장만을 구사하다 보면 자칫 글이 건조해지기 쉽다. 소설 문장이 다른 문장과 다른 것은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는 데 있다. 
159쪽 애매모호한 문장이라는 것은 담고 있는 의미, 즉 내포가 흐리멍덩해서 그 문장이 지시하는 바를 가늠하기가 어려운 문장을 말한다. 
은유적인 문장은 의미의 전달을 지연시키긴 하지만 의미의 전달을 방해하는 문장은 아니다.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장식으로서의 문장은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160쪽 사람이 멋있으면 좋지만 그보다 먼저 진실해야 하는 이치다. 멋은 진실이라는 기반 위에서만 의미를 갖는 가치다. 
소설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창의적인 발상이고 남다른 시각이고 자기만의 문장을 구사하는 일이라는 사실은 소홀하게 다뤄질 수 없다. 소설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행위다. 창조행위는 새로움과 변별성을 요구한다. 누가나 하는 말을 누구나 하는 방식으로 늘어놓는 문장에 이끌릴 리 없다. 
161쪽 글을 쓸 때, 작가는 곧 자기 글의 첫 번째 독자가 되어 자기가 쓴 문장이 상투적이고 평범하지 않은지 평가해야 한다. 
163쪽 다만 자신에게 적합한 문체만 있을 뿐이다. 자신의 체질과 개성에 맞는 문장을 개발하는 일이 문장 훈련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진실하고 멋있는 데다 개성까지 갖췄다면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165쪽 목소리만 듣고 우리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맞힌다. 사람의 얼굴이 다른 것처럼 목소리도 다르다. 글을 왜 그렇지 않겠는가. 
166쪽 어떤 작가는 무겁고 어떤 작가는 구체적이다. 어떤 작가는 관념적이고 어떤 작가는 추리를 내세운다. 이것이거나 저것이어야 한다. 그것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경우가 문제다. 
잘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하고 몸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 
167쪽 타고난 체질에 맞춰서 살고 음식을 먹고 운동을 하라고 한다. 체질을 변화시키는 게 어렵다면 체질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168쪽 문학적 체질을 알아낼 수 있는 샘플이 될 만한 작품들, 개성적인 자기 세계를 갖춘 소설들이 있다. 
169쪽 소설들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문학적 힘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이청준에 반응하는 사람이 있고 오정희에 반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169쪽 소설을 읽다 보면 흥분시키는 책, 흥분시키는 작가가 있기 마련이다. 그 경우 그런 작가, 그런 작품에 자신의 문학적 체질이 반응하고 있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작가의 작품을 섭렵함으로써 자신의 문학적 체질을 강화해나갈 일이다. 
170쪽 그 스승이 참된 스승이라면, 일단 한 스승에게 배우는 거이 좋다. 반복적으로 읽는 것이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오진이 아니어야 한다. 만약 오진했다면 엉뚱하게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한단의 걸음걸이를 배우고 있는 셈이 된다. 
바둑 격언 가운데 이런 게 있다. 정석을 익혀라. 그리고 잊어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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