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시 30분, 가벼운 숙취로 인해 늦은 아침의 시작이었다. 공용 공간에서 노트북을 켜고, 통유리창을 통해 빗소리를 보는데 평온함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침 겸 점심으로 어제의 바지락 국수 만들기를 시도했다. 실패도 성공도 아닌 시도에 의미를 둔 어정쩡한 맛이었지만 남김없이 먹을 수 있었다.
식사 후, 잠깐의 대화와 정리를 끝내고 다시 공용 공간으로 돌아갔다. 유지황 대표님과 마주했다. 본의 아니게 좋아하는 것과 수익 창출에 대한 연결이 현재의 화두라고 말씀드리게 되었다. 그러자 그냥 시작하는 걸 추천한다고 하셨다. 어차피 100을 계획해도 실행했을 때 계획대로 되는 건 10~20 정도였다고 말이다. 빨리 실행해서 문제를 마주하고 처리하는 편이 낫다고 하셨다. 계속 곱씹게 되는 짧지만 긴 여운이 남는 대화였다.
오후에는 예정된 사진 촬영을 했다. 촬영의 시작은 공용 공간의 평상에서 시작되었다. 사진 찍히는 것을 어색해하자 아기 백일 사진 촬영하듯 웃겨주셔서 꺄르르르 소리 내어 웃을 수 있었다. 글을 쓰며 다시 떠올리는데 입꼬리가 올라가는 감사한 순간이다.
되고 싶은 이상향 같은 사람과 이슬비를 맞으며 산책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자연스럽고, 하고 싶은 싶어서 하는 것이 나에게는 노력의 영역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타인과 닿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는데 이곳에선 그것이 귀하게 여겨졌다. 그들의 말이, 태도가, 글이, 생각이 마음에 기분 좋은 파문을 만들었다.
오후에도 비는 부슬부슬 내렸다. 그 비를 맞으며 코부기 옆에 있는 작은 텃밭에 배추 심기를 했다. 돌을 제거하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돌반 흙반이었다. 그래서 돌을 바지락이라 생각하면서 힘을 냈다. 어느 정도 돌을 제거한 후에는 흙을 평평하게 해 주었다. 윗부분의 흙과 아래에 있던 흙을 바꿔주고 도랑을 만들었다. 도랑을 만들고 비료를 뿌렸다. 빼낸 돌로는 돌담을 쌓았다. 코부기 뒤에는 감나무가 있는데 할아버지가 감을 주우러 오시니까 가지런히 쌓아야 한다는 말이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더 열심히 할 수 있었다. 방수가 안 되는 외투는 체온을 지속적으로 빼앗아갔고 추워서 얼른 따스한 물로 샤워를 했다. 그리고 다락방에 올라가서 낮잠을 잤다.
일어나자 따끈하고 하얀 국물이 먹고 싶어졌다. 첫날 먹었던 순대국을 먹으러 출발! 두 번째 먹는 건데 처음 먹었던 것처럼 맛있었다. 먹고 나오니 하늘이 개기 시작했고, 무지개가 보였다. 회색빛 하루가 무지개로 칠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무지개를 본 우연에 감사했다. 일몰 대신 찰흙처럼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웅장한 먹구름을 볼 수 있었다. 수채화 같았던 구름이 생생한 덩어리처럼 느껴지는 게 재밌었다.
잠시 비가 그쳤고, 옷이 펄럭이는 바람을 뚫고 방파제에 올라가보았다. 누군가에게 혼날 것 같아서 심장이 쿵쿵 뛰었지만 건너편으로 보이는 산과 마을의 불빛은 세상의 왕이 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팜프라촌의 공간과 그 안의 사람들은 안전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저기압 상태일 때 밝으려고 무리하지 않을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나답게 있을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고 밤 산책을 했다. 공용 공간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과 잠시 어울리고 또 산책을 하고, 또 산책을 했다.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 없어서 망설이는 나에게 그는 남해의 바다처럼 잔잔하게 다가와 나의 말을 들어주고, 자신의 말을 건넸다. 그의 말은 의지할 동아줄이 되었다.
'한달(한주)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주살기) 경남 남해_팜프라촌 : 9/3 토_마지막 날 (0) | 2022.09.14 |
---|---|
목포_빵집_씨엘비베이커리 : 유명한 곳이라 갔다. 기대도, 실망도, 특별함도 없지만 맛있다. (0) | 2022.09.13 |
한주살기) 경남 남해_팜프라촌 : 9/1 목 D+3 (조깅, 인터뷰, 편지, 카약, 바지락 캐기, 남해대로 1553번길 노을, 금산참능이) (0) | 2022.09.11 |
한주살기) 경남 남해_팜프라촌 : 8/31 수 D+2 (조깅, 목공 수업2) (1) | 2022.09.11 |
한주살기) 경남 남해_팜프라촌 : 8/30 화 D+1 (조깅, 바다향기 회센타, 모래 위의 발자국, 목공 수업) (1) | 2022.09.07 |
댓글